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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2m 블로킹보다 센 '168㎝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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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배구 최고 수비수 35세 김해란

공격 받아내는 디그 통산 8947개… 남자 1위보다도 4000개 이상 많아

"저도 모르게 생긴 멍이 꽤 있어요."

소매를 걷어붙이자 흰 팔뚝에 옅은 멍 자국이 나타났다. 수백, 수천 번 공을 받아 올리면서 생긴 '훈장'이었다. 코트와 '씨름'하며 생긴 상처도 몸 여러 곳에 있다고 했다. 괜찮으냐고 물으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아프긴 한데… 며칠 지나면 없어집니다. 공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어요. 익숙한 일이죠,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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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168㎝. 코트에서 가장 작은 선수인 리베로 김해란은 상대에게 그 어떤 블로킹보다 높은 벽이다. 최근 인터뷰에서 네트 위로 올라가 포즈를 취한 김해란. ‘내게 공을 때려볼 테면 때려보라’는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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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리베로다. 김해란(35·흥국생명)은 한국 여자배구 최고의 리베로(수비 전문 선수)다. 그는 프로배구 원년인 2005시즌부터 통산 서브 리시브와 디그(dig·상대 공격을 받아내는 것), 수비(리시브+디그)에서 모두 여자부 1위를 달린다. 특히 상대의 강력한 스파이크를 받아내는 디그 부문에선 압도적이다. 22일 현재 통산 디그 8947개로, 여자부 2위 임명옥(6980개)과 2000개 정도 차이 난다. 남자부 통산 1위 여오현(4816개)도 비할 바가 못 된다. 김해란은 이번 시즌에도 디그 1위(세트당 6.809개)에 올라 있다. 전문가들은 "흥국생명 선두 비결 중 하나가 블로킹보다 높은 '김해란 벽'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최근 경기도 용인 훈련장에서 김해란을 만났다.

김해란은 배구·육상 선수 출신 부모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그는 "초등학교 운동회 때 학부모 대표로 달리기에 출전한 어머니는 넘어지고도 1등을 할 정도로 운동 신경이 좋았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지금 신장(168㎝)이었던 김해란은 배구에 입문했다. 하지만 더는 키가 안 컸다. 마산제일여고 시절까지 단신(短身) 공격수로 코트를 누빈 그는 성인 무대로 넘어오며 리베로로 전향했다.

리베로는 화려한 서브, 강력한 스파이크를 받아내기만 한다. 시원한 공격 한 번 할 수 없는 역할에 불만은 없을까. "오히려 신의 한 수였죠. 만약에 키가 커서 계속 공격수를 했다면, 몸에 무리가 많이 와 진작 은퇴했을 겁니다. 지금의 자리가 좋아요." 2015년 올스타전 당시 팬 서비스를 위해 스파이크를 시도했다가 무릎을 다친 이후론 점프를 뛰지 않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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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나의 일상 - 김해란이 몸을 날려 코트에 떨어지는 공을 받아내는 모습. 이런 장면은 2005년 원년부터 코트를 누비는 김해란의 일상이다.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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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란은 "후배들이 체력적으로 힘들다고 할 때도 난 멀쩡하다. 평소 감기조차 잘 안 걸리는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건강한 몸과 순발력을 타고난 그도 어느덧 서른 중반이 됐다.

"눈으로는 공이 보이는데, 몸이 안 따라주는 경우가 있어요. 예전 같지 않은 거죠."

김해란은 훈련 파트너에게 더 강하고, 더 멀리 공을 보내달라고 부탁해 몸을 날린다고 한다. 일부러 강도를 높여 몸의 기억력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적지 않은 나이, 김해란은 선수 인생 어디쯤 지나고 있을까.

"늘 마지막 5세트 매치 포인트라고 생각해요. 몸이 허락하는 한 오래 뛰고 싶지만… 가정(2013년 결혼)도 있고 출산도 해야 하니 걱정이 좀 됩니다."

모든 수비 기록을 새로 쓴 그에겐 은퇴 전 반드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지 못한 챔피언 결정전 트로피다. 김해란은 "'난 왜 우승 복이 없지' 하며 자책한 적도 있었다"면서 "팀 구성원이나 분위기를 봤을 때 올해가 그 목표를 이룰 기회"라고 말했다.

[용인=이순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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