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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넘버3 골키퍼'의 눈부신 선방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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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러시아월드컵] 스웨덴전 맹활약 조현우, 대타 골키퍼서 주전으로 우뚝

2002년 여름 서울 강서구 신정초등학교 운동장. 호리호리한 초등학교 5학년생이 골대 앞을 막아섰다. 본래 왼쪽 수비수였던 그는 대회 하루 전날 주전 골키퍼가 그만두며 투입된 '땜빵용 골키퍼'에 불과했다. 그런데 포물선을 그리며 매섭게 축구공이 머리 위로 향할 때마다 믿을 수 없는 각도로 몸을 휘어가며 백이면 백, 전부 쳐냈다. 지켜보던 축구부 감독과 학우들 모두 입이 떡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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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처럼 솟구쳐오르다 - 한국 골키퍼 조현우가 18일 열린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에서 공중볼을 잡아내고 있다. 이날 월드컵 무대에 데뷔한 그는 페널티킥으로 한 골을 내줬을 뿐, 여러 차례 선방하며 한국 선수 중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했다. /오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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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16년 뒤 이번엔 한국 대표팀의 골문을 지켰다. 조현우(27)는 18일 2018 러시아월드컵 스웨덴과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뛰어난 판단력과 유연성을 앞세워 위기 순간마다 '놀라운 선방쇼'를 펼쳤다. 비록 후반 19분 페널티킥으로 한 골을 내주며 스웨덴에 패했지만, 그의 선방은 오랜만에 거리로 몰려든 '붉은 악마'의 스트레스를 깨끗이 풀어줬다.

중학교에 진학한 조현우는 "운동을 그만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았다. 1남2녀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한번 빠지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독종이었다고 한다. 조현우 아버지 조용복씨는 "놀이터 모래 놀이도 한번 흥미를 느끼면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멈출 줄 몰랐다. 밤늦게 아이 엄마가 찾으러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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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우가 초등학교 시절 수영장에서 찍은 사진. /대구FC


자신에게서 골키퍼 재능을 찾은 조현우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아예 주전 골키퍼로 포지션을 바꿨다. 연령대별 대표팀과 대학 선발팀에도 꾸준히 이름을 올렸다. 아버지 조씨는 "학창시절 다른 선수들처럼 가족들이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한 적이 없는데도 홀로 꾸준히 훈련에 매진해 더욱 대견했고, 또 미안했다"고 했다.

조현우는 2013년 대구FC에 입단했고, 한때 2부 리그로 강등된 팀을 1부 리그로 이끄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조현우는 2015~2016년 2년 연속 2부 리그 베스트 골키퍼로 선정됐다. 그는 지난해 1부 리그에 복귀해서도 가장 눈에 띈 골키퍼였다.

K리그 팬들은 조현우를 '대헤아(대구의 데헤아)'라고 부른다. 스페인 대표팀의 명골키퍼 '데헤아'처럼 노랗게 물들인 모히칸 헤어스타일(닭볏처럼 가운데 머리카락만 세운 것)을 수년째 고집하고 있어서다. 조현우는 프로 생활 3년 만인 2015년 11월 슈틸리케 전 감독에게 발탁돼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러나 김승규, 김진현에게 밀려 '제3 골키퍼'에 만족해야 했다. 이번 러시아 월드컵을 앞두고도 그는 '넘버3'였다. 좀처럼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고, 사실상 관심 밖의 선수로 여겨졌다. 조현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학 시절 종종 필드 플레이어로도 뛰면서 갈고 닦은 발 기술을 정진하고, 중앙선까지 공을 던질 수 있도록 어깨와 팔 힘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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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세르비아와의 친선경기는 '반전의 신호탄'이었다. 주전 골키퍼인 김승규가 훈련 중 발목 부상으로 갑자기 빠지자 신태용 감독은 경기 시작 3시간 전 그의 대체자로 '조현우'의 이름을 불렀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경기장을 향한 조현우를 3만여 명의 관중이 의심스럽게 쏘아봤다. 그리고 전반 26분, 조현우는 세르비아 아뎀 랴이치(27)가 찬 프리킥을 그림 같은 선방으로 쳐 내며 일대일 무승부를 지켰다. 팬들은 그제야 찢어질 듯한 환호성으로 새로운 주전 수문장의 등장을 반겼다.

조현우는 18일 스웨덴전에서 16년 전 신정초 시절 '땜빵용 골키퍼'의 기적을 재현하면서 '대구의 데헤아'가 아닌 '대한민국의 데헤아'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윤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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