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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 병역 혜택도 줄 잘 서야? 1980년대에 병역 특례 혜택 받은 야구 선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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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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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병역의무는 대한민국 국적의 건강한 남자면 누구나 마쳐야 한다. 운동선수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스포츠와 문화, (방위) 산업 등 특정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받는 병역 특례가 종종 사회적 문제가 되곤 한다. 최근에는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할 야구 대표 선수를 뽑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1945년 일제 강점기 해방과 함께 찾아온 남북 분단 그리고 가슴 아픈 민족상잔의 한국전쟁, 이후 7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정전 상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한국 스포츠와 군(軍)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 군은 스포츠 발전에 적지 않게 힘을 보탰다. 특히 축구가 그랬다. 육군본부와 해군본부는 1948년에 이미 축구부를 보유하고 있었다. 1949년에는 9개 팀이 출전한 사단 대항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때는 한국전쟁 전이어서 국군의 규모가 크지 않을 때다.

한국전쟁의 포연이 자욱했던 1951년 10월 경남 밀양에서 개최된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는 헌병사령부와 공군, 해군, 육군보병학교 등 군 팀과 조선방직, 대구방직, 한국모직 등 실업 팀이 자웅을 겨뤘다.

한국전쟁 뒤인 1955년 9월,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전국선수권대회 출전 팀을 살펴보면 이 시기 한국 축구에서 군이 차지한 비중을 한눈에 알 수 있다. 16개 출전 팀 가운데 군 팀은 병참단과 통신대, 해군, 22사단, 제7피복창, 해병대, 첩보대, 수도사단, 헌병사령부, 특무대, 1101공병단, 공군 등 12개나 됐다. 1956년 육군본부가 주최한 육군 축구 대회에는 사단 단위로 16개 팀이 출전해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1960년 대전에서 열린 전국체육대회 축구 대학부에서는 공군사관학교가 우승했다. 이 무렵 3군 사관학교는 축구, 럭비 등 자체 대회를 갖고 각종 국내 대회에 출전하는 등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1965년 4월 방첩대 축구부 해체는 군 축구가 한국 축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신호였다. 한국전쟁 와중인 1951년 특무대라는 이름으로 축구부를 만든 방첩대는 이후 14년여 동안 40명이 넘는 국가 대표 선수를 배출하는 등 축구 발전에 이바지했으나 단위 부대가 축구부를 운용하기에는 그 무렵 국내 축구 판이 많이 커져 있었다.

프로 출범 전인 1974년 한국실업축구연맹 가맹 팀은 한전, 자동차보험, 포철, 기업은행, 조흥은행, 외환은행, 국민은행, 주택은행, 신탁은행, 산업은행, 상업은행, 서울은행, 제일은행, 한일은행, 농협, 철도청 그리고 육군과 해군, 공군 등 19개 팀이었다. 추억의 은행 이름이 여럿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무렵 축구는 금융단이 이끌고 있었다. 군 축구의 퇴조가 본격화한 것이다. 그러나 1984년 국군체육부대(상무)가 창설되기 전까지 3군은 각자 축구부를 운용하며 변함없이 한국 축구 발전에 힘을 보탰다.

연세대 출신의 허정무와 고려대를 나온 차범근을 해병대와 공군이 경쟁적으로 영입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3군의 축구 사랑은 각별했다. 허정무는 1979년 3월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대통령배대회에서 해병대를 우승으로 이끌고 자신은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야구와 농구, 배구 등도 축구 못지않게 군 팀이 종목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물론 이 무렵에도 우수 운동선수의 군 문제는 이따금 사회 문제화됐다. 차범근 사례를 소개한다.

차범근은 1978년 12월 방콕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북한과 공동 우승을 차지한 뒤 단신으로 서독으로 향했다. 19살 때인 1972년, 청소년 대표 팀과 국가 대표 팀을 오가면 활약한 차범근은 그해 25살로 기량이 더욱 발전해 있었다. 당시 대한체육회 김택수 회장은 1960년대 체육계 인사들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어 차범근의 국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서독에 도착한 차범근은 다름슈타트 입단 테스트를 받았고 이어 가계약을 한 뒤 12월 23일 보훔과 경기에 나섰다. 그런데 이 출전은 행운이 따른 것이었다. 다른 구단들은 이미 크리스마스 휴식기에 들어갔는데 이 경기만 리그 일정에 남아 있었다.

그때 차범근은 공군 소속이었다. 군인인데다 당시 여권은 특수한 신분이 아니면 모두 단수였고 이듬해인 1월 여권 유효 기간이 끝나게 돼 있어서 차범근은 제대 절차를 밟고 다시 출국하기 위해 일시 귀국했다. 차범근은 일시 귀국해 여권을 다시 발급 받고 제대 신고도 할 요량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당시 공군 사병은 복무 기간이 2년 8개월로 요즘보다 긴 편이었다. 차범근은 1976년 10월 입대했는데 이때 공군 측에서는 차범근을 끌어와 전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차범근에게 특혜를 제공하기로 했다. 특혜 내용은 기초 군사훈련 과정 6개월을 복무 기간에서 빼 주기로 한 것이다. 그러니까 차범근은 2년 2개월만 근무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1978년 12월이면 제대되는 것으로 알고 제대 신고를 하러 일시 귀국한 것이다.

이때는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등이 독자적으로 운동부를 육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대 적령기 선수들을 놓고 종목별로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을 벌이곤 했다. 운동선수들에게 영외 거주 특례를 주기로 하고 스카우트하기도 했다.

아무튼 공군 측에서는 차범근이 군기를 어기고 소속 부대를 무단으로 이탈했다며 제대를 허가하지 않았다. 6개월의 특례 제안이 휴지 조각이 돼 버린 것이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군대 명령은 추상 같은 것이었다. 다름슈타트 입단이 졸지에 없던 일이 됐다.

출국이 불가능했으니 성탄절 휴식기를 끝내고 시즌이 재개된 분데스리가 일정에 맞춰 다름슈타트에 합류할 수 없어 계약은 자동 파기되고 선수 등록도 취소됐다. 이후 차범근은 6개월 동안 잔여 복무를 하게 됐고 분데스리가 문을 다시 두드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런 일화에서도 알 수 있지만 대체로 봐 1980년대 이전까지는 군대와 스포츠 사이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운동을 아무리 잘해도 군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81년 서울시가 제24회 여름철 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성공하고 1982년과 1983년 야구와 축구가 각각 프로화 하면서 운동선수의 병역이 조금씩 사회적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1981년 10월 정부는 병역의무의 특례 규제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개정해 운동선수들도 병역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고 발표했다. 이 개정안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우수 선수들이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에서 나온 조치였다.

병역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올림픽, 세계선수권대회 및 아시아선수권대회(청소년대회 포함), 유니버시아드, 아시안게임 등에서 3위 안에 든 선수로서 문교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선발위원회 심사를 거쳐 승인을 받으면 보충역으로 편입됐다.

수혜 대상이 꽤 넓었던 이런 병역 특혜 규정은 1984년 9월부터 올림픽 1~3위, 세계선수권대회 유니버시아드 아시안게임 우승자, 개인 기록 종목의 아시아 기록 수립자 등으로 범위가 축소됐고 1990년 4월부터는 올림픽 메달리스트, 아시안게임 우승자로 더욱 좁혀졌다가 1993년에는 한 해 동안 아예 폐기됐다. 그 뒤 1994년 1월 이 제도가 부활해 올림픽 메달리스트와 아시안게임 우승자에게 혜택을 주게 됐다.

이 법률 시행령은 1982년 출범한 프로 야구가 정착기인 1980년대 중·후반에 우수 선수를 안정적으로 수급하고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

이 제도가 생기고 소급 적용돼 병역 혜택을 받은 야구 선수만 1981년 당시 25명이나 됐다.

1978년 10월 베네수엘라에서 열린 제10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1981년 미국 오하이오주 뉴어크에서 열린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와는 주관 단체가 다른 대회] 준우승 멤버인 이상윤 김경표 이상군 박철영 김동재 김문영 장호연 한대화 김호근 정용락 양승호 장상철 김정수 양상문 김광림 김상훈 한문연 최광묵 양일환 신계석 등 20명과 1980년 8월 도쿄에서 열린 제26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 멤버인 최동원 김용남 이만수 박용성 박종훈 등 5명이었다.

야구 팬들이 잘 알고 있듯이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이후 프로 무대에서 활동했다. 특례를 받게 된 대회 당시 이들은 모두 고교 또는 대학 재학생이었다.

1980년 도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 멤버 가운데 이선희(농협) 정순명 김재박(이상 성무→공군) 황규봉(한국화장품) 심재원(경리단→육군) 유승안(한일은행) 김봉연(한국화장품) 배대웅 김용희 장효조(이상 포항제철) 김인식 이해창(아마추어 롯데 자이언츠) 유두열(한국전력) 등은 대회 당시 군 복무자였거나 이미 제대한 선수들이었다.

이어 1981년 뉴어크에서 벌어진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인 김건우(선린상고) 조계현 임동구(이상 군산상고) 이재홍(신일고) 선동열(고려대) 이효봉(대전고) 김동기(인천고) 김상국 조양근 (이상 북일고) 강기욱 배효욱(이상 대구고) 구천서(상업은행→우리은행) 김경호(진흥고) 임경택(마산고) 노승구(중앙고) 최종태(배문고) 최계영(부산고) 전응천(경남고)이 병역 특례 혜택을 받았다.

1982년 갓 개장한 잠실 구장과 인천 구장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는 장효조 김시진 이석규 정구선(이상 경리단) 유두열 최동원 임호균(이상 한국전력) 김정수 박노준 선동열(이상 고려대) 오영일 이선웅(인하대) 박동수 박영태 조성옥(동아대) 심재원 김재박 이해창(한국화장품) 김진우(인하대) 한문연 김상훈(이상 동아대) 한대화(동국대) 박종훈(상업은행)인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미 병역 특례 혜택을 받은 상태이거나 군 복무 또는 제대자들이었다.

1983년 서울에서 벌어진 제12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 가운데에는 신규로 병역 특례를 받은 선수들이 꽤 있다. 선동열 박노준 안언학(이상 고려대) 김용수(한일은행→우리은행) 민문식 김민호 김영신(이상 동국대) 이상군 김경표 김용국 유중일 박흥식(이상 한양대) 한희민(성균관대) 서효인(고려대) 강기웅(영남대) 이광국(한국화장품) 김성호(포항제철) 조성옥 김한조(이상 동아대) 이순철(연세대) 등이다.

그때에 견주면, 야구로 병역 특례를 받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됐다. 올림픽의 경우 야구가 정식 종목으로 열리는 2020년 도쿄 대회 이후 개최될 2024년 파리(프랑스) 대회와 2028년 로스앤젤레스(미국) 대회 그리고 최근 인도가 유치 도전 의사를 밝힌 2032년 대회는 야구의 정식 종목 채택이 불투명하다.

결국 4년마다 돌아오는 아시아경기대회[2022년 항저우(중국) 대회 2026년 나고야(일본) 대회]가 야구 선수들이 병역 특례를 받을 수 있는, 매우 힘든 무대가 되는 셈이다. 국가 대표 선수 선발 과정에 이런저런 얘기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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