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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울릉도는 나의 천국”…영원하라 포크 대부, 이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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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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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군(경북)=이데일리 스타in 김윤지 기자]“울릉도는 나의 천국입니다.” 우렁찬 목소리였다. 익숙한 멜로디에 형형색색 등산복으로 물든 객석이 일렁였다. 200여석의 극장은 일찌감치 꽉 찼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로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흥에 겨운 듯 모자를 벗어던지는 퍼포먼스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난 15일 밤 경북 울릉군 북면에 있는 울릉천국 아트센터에서 열린 상설공연이었다. 무대에 오른 이장희(71)는 활짝 웃어 보였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잔의 추억’, ‘그건 너’ 등 1970년대를 풍미한 대표곡부터 그 시절 즐겨 부르던 팝송까지. 우여곡절 많았던 그의 인생을 노랫말에 꾹꾹 눌러 담았다. 울릉도 예찬곡인 ‘울릉도는 나의 천국’, 쪽지만 남기고 떠난 전처와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쓴 ‘나는 누구인가’ 등 그의 노래는 곧 그의 인생이었다. 동방의빛 멤버였던 강근식(기타)·조원익(베이스)이 함께 했다. 빛나던 시절을 함께 보낸 음악 동지들이었다. 40년 동안 음악을 잊고 살았다는 그는 “한때 인생 그 자체였던 음악으로 다시 돌아와 벅차다”고 말했다. 콘서트를 위해 지난 2년 반 동안 오랜 친구들과 노래 연습을 해야 했다. 그 시간은 그를 다시 그 시절로 돌려놨다.

‘울릉천국’과 그의 인연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1년 데뷔한 이장희는 4년 동안 가수이자 DJ, 작곡가, 프로듀서로 활발히 활동했다. 1960~1970년대 인기였던 대중음악감상실 세시봉의 멤버이기도 했다. 1975년 대마초 파동은 사업으로 시선을 돌린 계기가 됐다. 1980년대 초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곳에서 방송국 라디오코리아, 레스토랑 등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요세미티, 알래스카 등 미국에서도 틈틈이 자연을 누비던 그였다. 1996년 출장 차 한국을 찾은 그는 지인 추천으로 울릉도를 찾았다. 은퇴 후 하와이에서 살겠다는 계획을 바로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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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에 홀딱 반했습니다. 포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오는데, 비경에 압도됐습니다. 판타지 영화 ‘반지의 제왕’ 같은 신비로움을 느꼈죠. 그렇게 몇 주 동안 곳곳을 걸어 다녔어요.”

이듬해 지금 공연장과 집이 있는 부지를 매입했다. 380m가 넘는 석봉이 내려다보고, 100년 된 약수터가 지근거리에 있는 그야말로 낙원이었다. 2004년 귀국해 울릉도에 터를 잡았다. 3년 동안 직접 농사도 지어보고, 조경으로 울릉도에서 가장 큰 호수도 만들었다. 20여년 사이 “압구정에 버금가는” 가격으로 올랐다.

공연장은 김관용 경북도지사의 아이디어였다. 정원을 가꾸며 조용히 살아가던 이장희의 ‘울릉천국’은 갑자기 유명 관광지로 떠올랐다. 2010년 MBC ‘무릎팍 도사’ 출연이 기점이 됐다. 이장희는 집 앞 부지 일부(연면적 1652m²)를 기부하고, 경북도·울릉군이 70억 원을 지원해 지상 4층 규모 공연장이 건립, 이달 8일 개관했다. 이장희와 강근식·조원익 등이 주 2~3회 70분 공연을 개최한다. 이제 개관 공연 후 2주가 지났지만 도민들과 관광객 사이에 조금씩 입소문이 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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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공연을 관람한 울릉군민인 이경영(57)씨는 “세세봉의 오랜 팬”이라며 “평소에도 주민들과 친근하게 어울리는 이장희인데, 그 시절 음악을 이장희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어 즐거웠다”고 말했다. 대구에서 온 정순정(62) 씨는 딸과 함께 공연장을 찾았다. “예약을 하고 배를 타고 왔다”며 “앙코르 곡인 ‘그건 너’를 들으며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더라”고 소감을 말했다.

콧수염에 가죽 재킷으로 오토바이를 몰던 그는 1970년대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집을 옮겨가며 밤새도록 음악에 대해 논할 만큼 음악에 흠뻑 빠져 살았다. 자유분방하던 청년은 어느새 초로의 신사가 됐다. 그 시절 날렵함은 옅어졌지만, 음악에 대한 애정은 여전했다. 여유도 느껴졌다.

“우리의 인생은 선택입니다. ‘이장희’란 이름값에 연연하며 살기보다는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았기 때문에 더없이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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