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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언더독 반란 이끈 이상범 “나를 낮추니 팀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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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DB 춤추게 한 식스맨 감독

주전 대거 빠져 시즌 전 꼴찌후보

맺힌 한 풀라했더니 백업들 펄펄

감독 실수 인정해야 선수도 따라

일본 경험 바탕으로 눈높이 지도

4강 PO 큰 경험 적어 걱정되지만

시즌처럼 4쿼터 역전 드라마 자신

중앙일보

‘최하위’ 전망이 무색하게 DB를 프로농구 정규시즌 우승으로 이끈 이상범 감독. [양광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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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농구 원주 DB 프로미 이상범(49) 감독은 지난 3일 창원 LG전에서 패한 뒤 “내 실수로 졌다”며 선수들에게 사과했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국내에서 보기 힘든 장면이다. 이 감독은 “내가 잘못한 걸 잘못했다고 말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먼저 용기를 내야 선수들도 그렇게 따라 한다”고 했다. 시즌 개막 전까지도 ‘꼴찌 후보’였던 DB는 예상을 깨고 2017~18시즌 정규리그에서 우승했다. 21년 프로농구 역사상 최대 이변이라 부를 만하다. 지난해 부임한 이 감독의 ‘용기’가 ‘약체’ DB를 단번에 바꿔놓았다.

우승이 확정된 다음날(12일) DB의 원주 숙소에서 만난 이 감독은 “나는 운 좋은 감독”이라며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던진 선수들 덕분에 우승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상범 감독은 2009~14년 안양 KGC를 이끌었다. 이후 국가대표팀 코치를 지냈고, 일본에서 고교·대학·프로팀을 돌며 지도자 생활을 했다. 이 감독은 “일본 경험을 통해 눈높이 지도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DB는 지난 시즌 5위에 그친 뒤 김영만 전 감독과 재계약을 포기했다. 팀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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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2017-2018 정관장 프로농구' 서울 SK나이츠와 원주 DB프로미의 경기에서 이상범 원주 DB 감독이 환호하고 있다. 2017.12.12/뉴스1




팀 고위 관계자가 일본에 직접 날아가, ‘리빌딩 전문가’로 불리는 이 감독을 만났다. KGC 감독 시절 하위권 팀을 챔피언결정전 우승(2012~13시즌)까지 이끌었다. 이 감독은 다른 팀에서도 사령탑 제의를 받았지만, DB의 정성에 마음이 끌렸다.

이상범 감독에게도 DB는 벅찬 도전이었다. 선수가 없었다. 주전 가드 허웅(26)은 군대에 갔고, 윤호영(34·포워드)은 부상 중이었다. 은퇴를 앞둔 김주성(39·센터)은 전성기 때처럼 뛸 수 없었다. 이 감독은 “1~2년은 밑바닥을 찍을 각오를 했다”고 했다. 두경민(26·가드)과 김주성을 빼곤 지난 시즌 경기당 10분 이상 뛴 선수가 없었다.

확실히 꼴찌 후보였다. 이 감독은 잇몸으로 빠진 이를 대신했다. 벤치를 지켰던 후보 선수들이 기대 이상 활약했다. 이 감독은 “백업 선수들에게 ‘그동안 맺힌 한을 코트에서 풀어라’고 동기부여를 했다. 경기에 꾸준히 나섰던 7~8명은 부쩍 자신감이 늘었다”고 했다.

가드 출신인 이상범 감독은 프로농구 첫 득점·리바운드의 주인공이다. 화려한 시절도 한때 있었지만, 식스맨이었던 시간이 더 길다. 31살이던 2000년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일찍 은퇴했다. 은퇴 뒤 팀의 배려로 코치 계약을 하고 1년간 미국에서 유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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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치는 이상범 감독 (원주=연합뉴스) 이상학 기자 = 11일 오후 강원 원주 종합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농구 원주 DB와 서울 SK 경기. DB 이상범 감독이 선수들에게 박수를 치며 격려하고 있다. 2018.3.11 hak@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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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독은 “나는 스타가 아닌 평범한 선수였다. 좋은 후배들이 많았고, 부상도 잦았다. 선수 생활을 길게 하기보다 빨리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코치 생활 10년간 5명의 감독을 모셨던 그는 “감독님들의 좋은 점만 배웠다. 대표팀 코치 시절 ‘인생의 멘토’ 유재학 감독(현대모비스)과 매일 2시간 넘게 농구 토론을 하며 배운 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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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DB선수들이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한 뒤 이상범 감독(가운데)을 헹가래치고 있다. DB가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건 6년 만이다. [원주=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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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는 개막 후 5연승으로 시즌 초반 선두를 질주했다. 13연승 등 6라운드 중반까지 전주 KCC, 서울 SK 등 2위 그룹을 멀찌감치 따돌린 채 1위를 달렸다. 하지만 지난 1일 KCC전과 4일 LG전에서 모두 지면서 2위 그룹에 2경기 차까지 쫓겼다. 이 감독은 “‘조금만 몰아치면 우승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욕심이 생겼다. 어느 순간 선수들을 질타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가 가장 큰 위기였다”고 했다.

시즌 막판 에이스 두경민의 이탈과 복귀 과정도 아슬아슬했다. 두경민은 지난달 10일 울산 현대모비스전에서 19분 동안 슛을 한 번만 쐈다. ‘태업’으로 판단한 이 감독은 두경민을 이후 4경기에 출전시키지 않았다. “그릇이 되지 않는 선수를 에이스로 지목한 내 실수”라고 독설도 했다.

두경민이 시즌 종료일 전에 결혼 날짜를 잡은 사실까지 알려졌다. 팬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이 감독은 “선수단 미팅에서 선수들 간 의견 충돌이 있었다. 그걸 코트에서 표현한 건 잘못이다. 그런데 팬들이 사생활 문제로 몰아가니 우리도 답답했다”고 털어놓았다. 결국 이 감독이 손을 내밀었고, 두경민이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 감독은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이번 일을 극복하면서 두경민도 많이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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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프로농구 서울 삼성-원주 DB 전이 4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진행됐다. 원주 DB 이상범 감독이 경길르 보면서 박수를 치고 있다.잠실=양광삼 기자yang.gwangsam@joins.com/2018.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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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범 감독은 “무엇보다 김주성, 윤호영이 중심을 잘 잡아줬다. 엄마, 아빠 노릇을 잘해준 게 우승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6년 전 DB 우승의 주역이었던 김주성, 윤호영은 이번 시즌 조연을 맡았다. DB는 28일 시작하는 4강 플레이오프에 나선다. 이 감독은 “선수들에게 큰 경험이 적어 걱정이다. 꼭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면 급해진다”며 “3쿼터까지만 버티면 이번 시즌 우리 팀이 그랬듯 4쿼터에 멋진 ‘역전 드라마’를 쓸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원주=김원 기자 kim.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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