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DB 춤추게 한 식스맨 감독
주전 대거 빠져 시즌 전 꼴찌후보
맺힌 한 풀라했더니 백업들 펄펄
감독 실수 인정해야 선수도 따라
일본 경험 바탕으로 눈높이 지도
4강 PO 큰 경험 적어 걱정되지만
시즌처럼 4쿼터 역전 드라마 자신
‘최하위’ 전망이 무색하게 DB를 프로농구 정규시즌 우승으로 이끈 이상범 감독. [양광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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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농구 원주 DB 프로미 이상범(49) 감독은 지난 3일 창원 LG전에서 패한 뒤 “내 실수로 졌다”며 선수들에게 사과했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국내에서 보기 힘든 장면이다. 이 감독은 “내가 잘못한 걸 잘못했다고 말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먼저 용기를 내야 선수들도 그렇게 따라 한다”고 했다. 시즌 개막 전까지도 ‘꼴찌 후보’였던 DB는 예상을 깨고 2017~18시즌 정규리그에서 우승했다. 21년 프로농구 역사상 최대 이변이라 부를 만하다. 지난해 부임한 이 감독의 ‘용기’가 ‘약체’ DB를 단번에 바꿔놓았다.
우승이 확정된 다음날(12일) DB의 원주 숙소에서 만난 이 감독은 “나는 운 좋은 감독”이라며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던진 선수들 덕분에 우승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상범 감독은 2009~14년 안양 KGC를 이끌었다. 이후 국가대표팀 코치를 지냈고, 일본에서 고교·대학·프로팀을 돌며 지도자 생활을 했다. 이 감독은 “일본 경험을 통해 눈높이 지도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DB는 지난 시즌 5위에 그친 뒤 김영만 전 감독과 재계약을 포기했다. 팀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2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2017-2018 정관장 프로농구' 서울 SK나이츠와 원주 DB프로미의 경기에서 이상범 원주 DB 감독이 환호하고 있다. 2017.12.12/뉴스1 |
팀 고위 관계자가 일본에 직접 날아가, ‘리빌딩 전문가’로 불리는 이 감독을 만났다. KGC 감독 시절 하위권 팀을 챔피언결정전 우승(2012~13시즌)까지 이끌었다. 이 감독은 다른 팀에서도 사령탑 제의를 받았지만, DB의 정성에 마음이 끌렸다.
이상범 감독에게도 DB는 벅찬 도전이었다. 선수가 없었다. 주전 가드 허웅(26)은 군대에 갔고, 윤호영(34·포워드)은 부상 중이었다. 은퇴를 앞둔 김주성(39·센터)은 전성기 때처럼 뛸 수 없었다. 이 감독은 “1~2년은 밑바닥을 찍을 각오를 했다”고 했다. 두경민(26·가드)과 김주성을 빼곤 지난 시즌 경기당 10분 이상 뛴 선수가 없었다.
확실히 꼴찌 후보였다. 이 감독은 잇몸으로 빠진 이를 대신했다. 벤치를 지켰던 후보 선수들이 기대 이상 활약했다. 이 감독은 “백업 선수들에게 ‘그동안 맺힌 한을 코트에서 풀어라’고 동기부여를 했다. 경기에 꾸준히 나섰던 7~8명은 부쩍 자신감이 늘었다”고 했다.
가드 출신인 이상범 감독은 프로농구 첫 득점·리바운드의 주인공이다. 화려한 시절도 한때 있었지만, 식스맨이었던 시간이 더 길다. 31살이던 2000년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일찍 은퇴했다. 은퇴 뒤 팀의 배려로 코치 계약을 하고 1년간 미국에서 유학했다.
박수치는 이상범 감독 (원주=연합뉴스) 이상학 기자 = 11일 오후 강원 원주 종합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농구 원주 DB와 서울 SK 경기. DB 이상범 감독이 선수들에게 박수를 치며 격려하고 있다. 2018.3.11 hak@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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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DB선수들이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한 뒤 이상범 감독(가운데)을 헹가래치고 있다. DB가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건 6년 만이다. [원주=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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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는 개막 후 5연승으로 시즌 초반 선두를 질주했다. 13연승 등 6라운드 중반까지 전주 KCC, 서울 SK 등 2위 그룹을 멀찌감치 따돌린 채 1위를 달렸다. 하지만 지난 1일 KCC전과 4일 LG전에서 모두 지면서 2위 그룹에 2경기 차까지 쫓겼다. 이 감독은 “‘조금만 몰아치면 우승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욕심이 생겼다. 어느 순간 선수들을 질타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가 가장 큰 위기였다”고 했다.
시즌 막판 에이스 두경민의 이탈과 복귀 과정도 아슬아슬했다. 두경민은 지난달 10일 울산 현대모비스전에서 19분 동안 슛을 한 번만 쐈다. ‘태업’으로 판단한 이 감독은 두경민을 이후 4경기에 출전시키지 않았다. “그릇이 되지 않는 선수를 에이스로 지목한 내 실수”라고 독설도 했다.
두경민이 시즌 종료일 전에 결혼 날짜를 잡은 사실까지 알려졌다. 팬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이 감독은 “선수단 미팅에서 선수들 간 의견 충돌이 있었다. 그걸 코트에서 표현한 건 잘못이다. 그런데 팬들이 사생활 문제로 몰아가니 우리도 답답했다”고 털어놓았다. 결국 이 감독이 손을 내밀었고, 두경민이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 감독은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이번 일을 극복하면서 두경민도 많이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남자프로농구 서울 삼성-원주 DB 전이 4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진행됐다. 원주 DB 이상범 감독이 경길르 보면서 박수를 치고 있다.잠실=양광삼 기자yang.gwangsam@joins.com/2018.0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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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범 감독은 “무엇보다 김주성, 윤호영이 중심을 잘 잡아줬다. 엄마, 아빠 노릇을 잘해준 게 우승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6년 전 DB 우승의 주역이었던 김주성, 윤호영은 이번 시즌 조연을 맡았다. DB는 28일 시작하는 4강 플레이오프에 나선다. 이 감독은 “선수들에게 큰 경험이 적어 걱정이다. 꼭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면 급해진다”며 “3쿼터까지만 버티면 이번 시즌 우리 팀이 그랬듯 4쿼터에 멋진 ‘역전 드라마’를 쓸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원주=김원 기자 kim.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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