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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흑인 여성, 그 이중의 굴레를 벗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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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미국드라마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한겨레

에이비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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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방송을 지켜보는 모든 소녀들이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기를 희망한다.” 제7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오프라 윈프리의 소감만큼 이번 시상식의 역사적 의미를 잘 담아낸 말이 또 있을까.

성폭력에 반대하는 검은 의상 시위가 펼쳐진 레드카펫에서부터 영화와 티브이 전 분야의 작품상이 모두 여성 중심 이야기에 돌아간 마지막 수상까지, 여성의 연대가 새 역사를 만들어낸 시상식이었다. 물론 절정은 오프라 윈프리가 무대에 오른 순간이다. 윈프리는 75년의 시상식 역사상 흑인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며 스스로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 됐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중문화인 중 한 명인 윈프리는 영화와 티브이를 오가며 배우, 제작자, 진행자 등으로 굵직한 활약을 펼쳐왔다. 특히 흑인 여성이라는 이중의 소수자로서 정체성은 그녀가 전 경력을 통해 일관되게 탐구해온 문제였다. 이러한 주제를 잘 보여준 대표작으로 영화 쪽에서는 배우로 참여한 <컬러 퍼플>이 있다면, 드라마로는 직접 제작한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원제 ‘Their Eyes were Watching God’)를 들 수 있다. 2005년 <에이비시>(ABC) 방송사에서 방영한 이 단막극은 오프라 윈프리가 무려 9년 동안 공들여 준비한 작품이다. 미국 흑인 여성 문학의 선구자 조라 닐 허스턴의 동명 소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영상화했다는 윈프리는 의도에 맞춰 오스카 ‘최초의 흑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핼리 베리, 퓰리처 수상 극작가 수전로리 파크스, 뉴욕 비평가협회 신인감독상 수상자 다넬 마틴 등 여성 영화인 드림팀을 구성했다.

드라마는 원작의 주요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간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흑인 여성 재니(핼리 베리)가 로건 킬릭스(멜 윙클), 조 스타크스(루번 산티아고허드슨), 티 케이크(마이클 일리)라는 흑인 남성 세 명과 각각 결혼과 이별을 겪으며 진정한 자아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다만 약 두 시간 분량 안에 꽤 두꺼운 원작 소설의 정수를 담아내기 위해 배경 설명은 최대한 축소하고 재니의 심리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억눌렸던 욕망을 깨닫거나 탈주를 꿈꾸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재니의 표정에 집중하며 의식의 흐름을 몽환적으로 담아내는 연출은 1930년대의 원작 소설이 시대를 앞서 표현하고자 했던 주제를 이제야 제대로 해방시킨 듯하다.

리처드 라이트, 랠프 엘리슨 등 미국 흑인 문학 거장으로 불리는 남성 작가들이 인종 문제를 정치적 언어로 써내려갈 당시, 흑인 여성의 독립적 자아와 욕망을 이야기한 허스턴은 상대적으로 폄하당하고 문학사에서도 거의 잊히다시피 했다. 그것이 실은 백인 중심주의와 가부장제라는 이중의 억압에 저항한, 더없이 선구적이며 정치적인 서사였음을 발견한 이들은 오프라 윈프리와 같은 수십년 뒤의 후배 여성들이었다. 이번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성들이 입을 모아 외쳤던 ‘잊혀진 역사’이자 앞으로 더욱 유효할 대안적 서사의 강렬한 사례가 바로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에 있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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