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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1류 제친 초2류 '열혈남아'의 죽음…일본 야구감독 호시노 센이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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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시절 한국팬에 이름 알려…최고 위한 노력으로 점철된 생애 '눈길'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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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우리에겐 선동열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의 스승으로, 일본에선 끝까지 전투를 마다치 않는 투장(鬪將)으로 기억되는 야구계의 ‘열혈남아’ 호시노 센이치 전 감독이 지난 4일 7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가 죽기 전 남긴 마지막 말은 “코치 회의엔 나갈 수 있을까” 로 알려졌다. 눈 감는 그 순간까지 야구 생각만 하던 그의 성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일본 전후 세대 첫 1000승을 기록한 감독으로 기록된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선수들과 팀을 강하게 훈련시켜 약팀을 강팀으로 거듭나게 하는 ‘투장’ 이었다.

1969년 일본 프로야구 센트럴리그 소속 주니치 드래곤즈 구단에 입단해 선수 생활을 시작한 호시노 감독은 데뷔 이후 통산 146승(121패 34세이브)을 거둔 에이스 투수로 1974년엔 그해 최고 투수에게 주는 ‘사와무라 상’을 수상한 1류 선수였다. 하지만, 프로 입단 당시 호시노 감독은 큰 상처를 입는 사건을 겪는다.

구라시키 상고 시절부터 에이스 투수로 활약한 호시노 감독은 메이지 진학 후 도쿄 6대학 리그의 스타로 일찍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지명이 점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1968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는 호시노가 아닌 고교생 투수를 지명했고, 주니치 드래곤즈 지명을 받은 호시노는 이때부터 철저한 ‘안티 거인’ 행보를 시작하게 된다.

선수 은퇴 후 코치 생활을 거쳐 그가 주니치 사령탑을 맡았을 당시 팀에 입단한 선동열 현 국가대표팀 감독이 부진한 성적을 보이자 즉각 2군으로 강등하며 “그렇게 할 거면 한국으로 돌아가라” 호되게 질책했고, 이에 절치부심을 거듭한 선 감독은 완벽하게 부활해 ‘나고야의 태양’으로 거듭났고 이후 이종범, 이상훈을 줄줄이 기용해 대한민국에 이름이 알려진 감독이 됐다.

그는 스스로 ‘초(超)2류’를 자청한 인물이었다. 1류는 아니고, 그렇다고 2류 라고도 할 수 없는 존재를 자임했는데, 실제 그가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를 낀 건 2013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무너트리고 사상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라쿠텐 감독 시절이 전부다.

프로야구 입문 44년, 감독 생활 27년 만에 평생 숙적을 상대로 최약체 팀을 끌어올려 이룬 성과였기에 전 일본 열도는 그의 승리를 '인간승리'로 기록했다.

한국야구와도 인연이 각별했던 그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사령탑을 맡으며 한국 팀과의 신경전을 벌였는데, 이대호를 ‘스모선수’에, 이승엽에겐 “제대로 치지도 못하는 4번 타자”라는 도발적 발언을 쏟아냈지만 정작 그 두 선수 모두 일본전 홈런을 날리며 일본전 승리와 함께 금메달의 주역이 됐고, 일본은 4위에 그쳐 일본 팬들로부터 ‘한국계가 아니냐’는 조롱 섞인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해봐서 안 되면, 한 번 더 해보면 되잖아!”

호시노 감독은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팀이 승리를 거둔 날에도 공개적 신상필벌을 확실히 이행하되 선수를 질책할 때는 공개적인 자리가 아닌, 1:1로 호출해서 야단칠 만큼 사려 깊은 리더였다.

설령 한 번 실패했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쉼 없이 도전하는 자세는 눈 감는 순간까지 야구를 생각한 그의 집념과 일생에 걸친 열정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가 라쿠텐 감독직에서 물러나던 날, 구단을 가득 메운 관중과 팀은 그를 배웅하며 그가 남긴 말을 한마음으로 외쳤다.

“꿈이여 고맙다”

초2류를 자처했던 열혈남아는 1류를 제치고 끝내 꿈을 이룬 뒤,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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