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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거두절미하고 ‘히딩크 데려오라’ 하니 오만 정이 떨어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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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김창금의 축구광

김호곤 전 축구협회 기술위원장

러시아월드컵 본선 진출 확정 뒤

24시간도 안 돼 ‘히딩크 논란’ 터져

“히딩크재단 쪽 카톡 잊고 있었다,

카톡으로…제안 같지도 않은 제안”

과거 ‘히딩크 ×× 욕설’ 다시 입길

“14년 지나서 왜 그 얘기 나오나”

젊은 세대로 바뀐 축구협회 집행부

“지금은 케케묵은 시대 아니야”



한겨레

“생전 처음 축구를 쳐다보기도 싫다는 생각에 나도 깜짝 놀랐다.” 2018 러시아월드컵 본선 진출 확정 직후 이른바 ‘히딩크 논란’에 휘말렸던 김호곤 전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이 지난 15일 서울 장충동 한 공원에서 <한겨레>와 만나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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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아테네 젊은이를 타락시킨다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논리적이고 말 잘하는 소크라테스는 죽임을 당했다. 민주주의 제도나 대중의 심리는 때로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분출되거나 기괴한 폭력이 된다.

지난 9월 김호곤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신태용 감독 체제의 대표팀이 월드컵 본선행을 일군 이후 두 달 반 동안 한국 축구를 둘러싼 환경은 아테네 민회의 재판정 같았다. 월드컵 본선 탈락의 위기에서 막바지 두 경기 무승부로 기적적으로 본선행에 성공한 김호곤 기술위원장과 신태용 감독은 ‘개선 영웅’이 아니라 ‘역적’ 대접을 받았다. 9월6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공항에서 귀국 항공편 탑승을 앞둔 신태용 감독이 한 얘기는 아직도 생생하다. “서울 도착해서 울어야 합니까? 웃어야 합니까?”

국내 한 언론의 “거스 히딩크 대표팀 감독, 한국 대표팀 맡을 용의 있다”는 보도로 시작된 파문은 히딩크 감독의 ‘부정도 시인도 않는다’는 엔시엔디(NCND)식 반응으로 증폭됐고, 누리꾼들의 악성 댓글과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의 상승 작용, 10월 대표팀의 러시아·모로코전 참패를 정점으로 대한축구협회를 그로기 상태로 몰았다.

결국 김호곤 기술위원장의 사퇴와 축구협회 집행부의 세대교체,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의 콜롬비아·세르비아 국내 평가전 선전 등으로 사태는 일단락이 된 듯하다. 하지만 형식도 내용도 불명확한 히딩크 측근의 ‘카톡 메시지’를 매개로 2개월간 한국 축구판을 벌집 쑤시듯 헤집었던 ‘아테네 법정’은 많은 생각거리를 남겼다. 개인의 추론이나 의견이 사실이 되고, 미디어와 누리꾼의 댓글이 ‘마녀사냥’ 식으로 희생양을 찾는 과정에서 합리적 사고는 실종했다. 김호곤 기술위원장이 사퇴 전 “가족들이 너무 힘들어한다”고 기자들한테 토로한 것은 익명의 댓글 폭력에 따른 상처의 단면이다.

세상의 부조리함에도 말 한번 제대로 하기 힘들었던 김호곤 전 기술위원장을 15일 서울 남산 자락에서 만났다.

“본선 진출만 생각하라고 요구했다”

―무거운 짐을 벗었다. 시원섭섭할 것 같은데….

“축구 인생 50년 동안 눈치 보지 않고 내 일에 충실했다. 난 원래 축구 야당으로 제도권에서는 찍혔던 사람이다. 하지만 지도자 경험과 축구에 대한 열정 때문인지 협회에 등용돼 전무 등 주요 보직에서 행정도 하고, 대표팀이나 프로팀 감독으로 성적도 냈다. 통영 촌놈이라 생각해 실력이나 성과로 평가받으려 했고 뽑아주면 열심히 했다. 윗사람한테 알랑방귀를 뀌어 자리를 탐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엔 너무 심했다. 협회가 잘못하면 욕먹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사람이나 협회를 죽이려 해서는 안 된다. 잘못은 있지만 더 잘할 수는 없겠느냐는 발전적인 방향에서 얘기가 이뤄져야 한다.”

―월드컵 예선에서 실망스러운 경기를 한 것은 사실 아닌가. 우즈베크와 비긴 뒤 감독 헹가래까지 쳤는데.

“신태용 감독한테 몇 번 다짐을 받았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월드컵 본선 진출만 생각하라고 요구했다. 다른 나라가 이기고 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가 나갈 수 있는 방법에만 전념했다. 그러자면 화려하고 공격적으로 할 수가 없다. 헹가래도 마찬가지다. 과거처럼 텔레비전에서 이원 중계방송으로 이란-시리아 경기를 보여줬다면 선수들의 헹가래가 이란-시리아전 뒤에 이뤄졌다는 것을 팬들이 금방 알았을 것이다.”

김호곤 기술위원장은 9월6일 우즈베크 전 무승부로 본선을 확정한 뒤 24시간도 채 되기 전에 히딩크 감독 논란이 불거지면서 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어찌 됐건 대표팀을 이끌고 본선행을 일군 신태용 감독을 평가해주지 못할망정 내친다는 것은 축구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니라고 봤다. 실제 미국이나 이탈리아, 칠레 등 대륙별 챔피언들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한국팀의 9회 연속 진출은 꽤 큰 성취로 볼 수 있다.

―히딩크 감독 이슈가 떠올랐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히딩크 감독은 한국 축구의 영웅이다. 만약 6월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경질된 직후 히딩크 감독이 한국팀을 이끌겠다고 알려왔다면 우리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을 것이다. 히딩크만큼 확실한 사람도 없고, 설령 본선에 떨어지더라도 기술위원회는 역풍을 피해갈 수 있다. 그러나 일절 그런 제안은 없었다. 그래서 한국 선수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외국인 감독은 배제했다. 국내 후보자 풀은 제한적이었는데, 그 가운데서 현장감이 있고 선수와의 소통도 뛰어나다고 판단해 신태용을 뽑았다.”

―귀국 공항에서 히딩크 재단 쪽에서 보내온 카톡 메시지를 놓고 거짓말을 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나는 6월에 노제호 거스히딩크재단 사무총장이 카톡을 보낸 것을 잊고 있었다. 당시 ‘예선 마지막 두 경기는 다른 감독이 맡고, 본선 가면 히딩크가 관심이 있다’는 카톡 메시지를 보고 속으로 ‘미친 소리’라고 화를 낸 뒤 잊어먹었다. 만약 내가 공항에서 그 카톡 내용을 기억했더라도 나는 제안이 왔었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막말로 ‘미친놈’의 제안을 공식화시키고 띄워주는 것이다.”

사실 카톡 메시지는 대중들이 많이 사용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수단일 뿐 공식성은 담보하지 않는다. 장익영 한체대 교수(스포츠사회학)는 “개인들끼리의 연락 방식인 카톡을 다수의 사람이 사용하면서 파급력이 큰 의사소통 수단이 된 것은 맞다. 하지만 카톡이 공공의 매체 기능을 하거나 공문처럼 공식적인 힘을 갖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카톡은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사회관계망서비스이고 여전히 사적인 영역에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언론은 진실공방으로 이슈를 몰아갔다.

―카톡 메시지를 나중에 받았다고 해 거짓말쟁이로 몰렸는데….

“정말 억울하다. 내가 축구계에 무슨 나쁜 짓을 했나. 말도 안 되는 카톡의 내용 아닌가. 아니, 예를 들어 문재인 대통령한테 트럼프 대통령이 ‘내가 대통령 할 테니 자리 비워’라고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을 제안으로 보는 게 정상적인가. 계약된 감독이 있는데, 제안 같지도 않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사람을 인신공격하는데 기가 찼다. 생전 처음 축구를 쳐다보기도 싫다는 생각에 나도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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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김호곤 전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은 “(축구협회가 잘못은 있더라도) 더 잘할 수는 없겠느냐는 발전적인 방향에서 얘기가 이뤄졌으면 한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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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박지성 차출 두고 히딩크와 ‘앙금’

―히딩크 감독이 좀더 명확하게 입장을 밝혔어야 하는 것 아닌가?

“국정감사에서도 나왔지만 카톡 메시지는 히딩크의 발언이 아니라 노제호 사무총장이 히딩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식으로 자기 생각을 전한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절대로 그런 얘기를 할 분이 아니다. 그래도 한국이 제2의 고향인 히딩크 감독한테 약간 서운하기도 하다. 만약 히딩크 감독이 ‘감독이 바뀌는 어려운 상황에서 본선에 올라간 것을 축하한다’라고 심플하게 말 한마디 해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히딩크 이 ××’라고 욕했다는 보도도 나왔는데.

“그게 2003년 2월이다. 올림픽대표팀 이끌고 남아공 전지훈련에서 죽도록 고생하다가 네덜란드에서 두 차례 평가전을 한다는 기대에 부풀어 먼 길을 갔다. 먼저 네덜란드 올림픽대표팀과 싸워 기분 좋게 이겼고, 히딩크 감독이 지휘하는 에인트호번 23살 팀하고 경기가 남았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이 갑자기 인조잔디 구장에서 하겠다고 알려왔다. 우리 선수들은 계속 천연잔디에서 훈련했고, 자칫 부상의 위험이 있어 경기할 수가 없었다. 그때 몹시 화가 나 말실수를 했다. 그런데 14년이 지난 지금 왜 그 이야기가 나오는가. 맥락에 맞기는 한 것인지 되묻고 싶다.”

김호곤 감독과 히딩크 감독 사이엔 그 욕설 이후 약간의 앙금이 남았다. 김호곤 감독은 2004 아테네올림픽에서 사상 처음으로 8강에 올랐는데, 만약 히딩크 감독이 당시 올림픽 주력이던 23살이던 박지성을 보내줬더라면 4강까지 충분히 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현재 대표팀에서 손흥민이나 기성용이 차지하는 비중을 그려보면 박지성의 유무는 팀 전력의 핵심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가정 역시 히딩크 이슈의 본질적 사안인 카톡의 내용과 형식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국내 축구계가 외부 충격에 너무 약한 것은 아닌가?

“축구는 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발로 한다.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명장 데려온다고 성적 낼 수 있다면 그게 월드컵 우승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누가 와도 옛날처럼 1년 넘게 합숙훈련 할 수 없고 고작 3일간 데리고 훈련해야 한다. 축구인들이 이런 것을 너무 잘 안다. 그런데 대중적으로 알려진 축구인 후배가 거두절미하고 ‘히딩크 데려오라’고 하니 오만 정이 떨어지더라.”

―기술위원장을 그만두면서 아쉬운 점은 없는가?

“기술위원장 되려고 한 것도 아니고, 비상시국이라 책임감 때문에 회장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 생각은 명확하다. 기술위원회는 한국 축구의 기술을 발전시켜야지 A대표팀 감독을 뽑는 게 아니다. 초중고 학원 축구는 과도기에 있다. 정부는 ‘공부하는 선수’를 정책으로 내세웠다. 방향은 맞지만 현장의 지도자들은 불만이 높다. 축구협회가 그 사이에 끼어 있는데, 정부를 상대로 누가 이기겠는가. 그래서 일본축구협회도 갔다 오고 학원 축구의 문제점 해소를 위해 초중고 축구연맹 전무들이 한곳에 모여 논의하고 교육부에 건의할 수 있는 아이디어도 내라고 학원축구발전위원회도 만들었다. 초중고 현장 지도자와 심리상담사, 체력담당자를 결합해 세미나도 가고, 토론도 할 수 있는 소위원회 시스템을 만드는 중이었는데 히딩크 논란 때문에 시간도 잃고, 지금은 어찌할 수도 없다. 그래도 기술위원회가 전문영역으로 분리되고, 대표팀 감독을 선임위원회에서 뽑도록 협회 정관이 바뀐 것은 내 생각이 반영된 것 같아서 좋다.”

―홍명보 전무 등 젊은 세대로 축구협회 집행부가 바뀌었는데.

“나이가 적다고 하지만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다. 내가 50대에 기술위원 하려고 하니까 선배들이 어리게 본 적이 있다. 이제는 케케묵은 시대가 아니다. 처음부터 행정을 다 알 수는 없고 경험은 없지만, 그렇다고 날 때부터 행정가라고 이름 박고 태어나는 사람도 없다. 축구 외적인 것은 사무총장이 보좌하니까 충분하고, 홍 전무는 축구 일에만 전념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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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참가했을 당시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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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생명과 감정 있는 선수들을 다룬다”

―누리꾼 악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는데….

“실명으로 댓글을 달도록 법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럼 그분과 직접 만나서 얘기도 하고 설득도 할 수 있다. 지금 형식은 한 사람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까지 파괴하는 흉기가 되고 있다. 미디어도 이런 부분을 염두에 뒀으면 한다. 한 줄 기사를 쓰면 그 기사의 피해를 보는 당사자의 처지도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다.”

―축구 해설자들이나 축구기자들에 대한 불만은 없나?

“축구인들이 축구를 보는 것과 기자들이 보는 것이 다르다. 축구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감독은 생명과 감정이 있는 선수들을 다룬다. 그것은 4-4-2나 3-5-2 등 논리나 이론의 세계와는 다른 영역이다. 바르셀로나에서 4-4-2를 쓴다고 우리가 그대로 쓰면 되지 않는다. 선수들의 기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상대 분석에 따라 배치를 하고, 그것을 나중에 4-4-2나 3-4-3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자나 해설자들은 너무 디테일하게 깊이 들어간다. 이론과 실제와는 차이가 있는데, 그렇다 보니 축구팬들은 더더욱 다른 식으로 축구를 이해할 수도 있다.”

사실 독일이나 스페인 등 유럽에서도 축구협회나 감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늘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처럼 드라마틱한 데는 없는 것 같다. 축구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끼치는 힘도 크지만 축구 저널리즘의 수준이 그 나라 정치나 사회, 문화나 심리를 반영할 수도 있다. 클릭 수나 댓글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미디어 환경 조건의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팩트체크나 크로스체킹 등 미디어의 본질적인 태도가 희석될 수는 없다.

김호곤 전 축구협회 기술위원장 프로필

출생 1951년 경남 통영

학력 동래고-연세대

선수·지도자·행정가 경력

1979년 상업은행 입단

1971~80년 국가대표 수비수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남·북 공동우승 주장

1980년 국가대표팀 코치

1986년 멕시코월드컵 국가대표팀 코치

1992년 올림픽대표팀 코치

2004년 아테네올림픽 8강 감독

2005~08년 축구협회 전무

2012년 울산 현대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2014년~17년 11월2일 축구협회 부회장, 기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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