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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저무는 태릉선수촌 시대…영광의 반세기 역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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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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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대한체육회 이기흥 회장은 26일 기자 간담회를 열고 "9월 첫 주에 진천선수촌 개촌식을 열 계획이다"고 밝혔다.

1966년 건립돼 국가 대표의 요람으로 불린 태릉선수촌은 올해 가을 충북 진천으로 이전하게 된다. 진천선수촌은 2009년 2월 1단계 착공을 시작해 2011년 8월 1차 준공했고 2013년 12월 착공한 2단계 시설 공사는 공정률 86%를 보이고 있다.

1970~90년대, 한국 스포츠가 급속도 발전하는 과정에서 태릉선수촌이 이바지한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시대 스포츠 기자들에게 태릉선수촌은 매우 중요한 출입처 가운데 하나였다.

그 무렵 있었던 태릉선수촌 관련 일화를 소개한다.

1983년 멕시코 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FIFA U 20 월드컵 전신) 4강으로 분위기가 한껏 고조돼 있던 국내 축구계가 발칵 뒤집히는 일이 그해 가을 태릉선수촌에서 벌어졌다. 박종환 감독과 원흥재 코치가 이끄는 축구 대표 팀 주장 이태호를 비롯해 최순호, 변병주, 박경훈, 최인영 등 주력 선수 5명이 9월 6일 오전 당시 유일하게 자가용을 갖고 있던 최순호의 차에 타고 유유히 태릉선수촌을 빠져나간 것이다.

그날은 화요일이었으니까 주말마다 있는 외출이 아니었다. 때마침 사격 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인근 태릉사격장에 있던 <한국경제> 김덕기 기자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박 감독과 만나기 위해 태릉선수촌을 찾았다. 김 기자는 그해 2월 방콕에서 열린 국제청소년축구대회를 취재하며 박 감독과 가까워 진 사이였다. 이 대회에서 우승한 청소년 대표 팀이 그해 6월 멕시코 4강 신화를 이룬 바로 그 팀이다.

박 감독은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의 좋은 성적을 발판으로 그해 8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지역 예선에 대비해 구성된 국가 대표 팀 사령탑에 오른 터였다. 태릉선수촌 전진관 302호 박 감독 방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김 기자는 대표 팀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다는 낌새를 챘다.

박 감독은 김 기자를 만나자 마자 특정 선수 이름을 거론하며 “이 자식, 훈련도 열심히 하지 않고”라고 말하는가 하면 불특정 다수를 향해 “이 나쁜 놈들, 어떻게 이렇게”라고 하면서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김 기자는 박감독의 말에 슬쩍 맞장구를 치면서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추가 취재를 해야 할지 계획을 짜고 있었다.

박 감독과 헤어진 김 기자가 주변 취재를 한 결과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이튿날 스포츠 전문지가 아닌, 경제 전문지 <한국경제>에 축구 관련 특종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김 기자는 이후 스포츠서울로 옮겨 축구 전문 기자로서 맹활약한다.

아무튼 이 일은 1966년 태릉선수촌이 문을 연 뒤 일어난 최대 사건으로 선수촌 생활과는 크게 관계없는 축구 대표 팀 내부 갈등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축구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대표 팀 때부터 촌외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파주에 축구 전용 트레이닝 센터가 생겨 축구 국가 대표 팀과 태릉선수촌이 얽힐 일은 없다.

태릉선수촌과는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야구도 태릉선수촌에 입촌하던 때가 있었다. 1975년 6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1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통산 3번째 정상에 선 한국은 그해 8월 캐나다에서 열린 제2회 대륙간컵대회에 출전하면서 세계 무대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때 야구 대표 팀은 한국 야구 사상 처음으로 태릉선수촌에서 체력 훈련을 했다.

진천선수촌에는 야구장이 있지만 태릉선수촌 안에는 야구장이 없으니 기술 훈련은 서울운동장에서 했다. 2년 뒤 이름이 수퍼 월드컵으로 바뀐 이 대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세계 규모 대회에서 우승한 한국은 1980년 8월 제26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야심 차게 준비했다. 그해 1월과 2월 호주와 일본 가고시마에서 한국 야구 사상 처음으로 국외 전지훈련을 했다. 가고시마 전지훈련을 앞두고는 태릉선수촌에 들어가 강한 체력훈련을 했다.

도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일본 대표인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과 대형 3루수로 주목을 받은 김용희 전 롯데 자이언츠·삼성 라이온즈·SK 와이번스 감독은 “이곳이 훌륭한 선수들이 있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태릉선수촌에 입촌했다는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이긴 하지만 선수가 선수를 존경한 것이다.

그런데 그 무렵 야구 대표 선수들은 다른 종목 대표 선수들에게 놀림감이었다. 웨이트트레이닝장에 있는 기구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영을 하면 근육이 풀려 야구를 하는 데 해롭다는 생각을 하던 때이니 그럴 만도 했다. 프로화가 된 이후 더더욱 태릉선수촌과 멀어진 축구와 야구지만 그래도 태릉선수촌에 얽힌 일화는 이렇게 전해지고 있다.

태릉선수촌 이전에도 국가 대표 선수들을 위한 시설이 있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은 이웃 나라에서 열리는 대회인데다 60만 재일 동포의 사기 문제가 걸려 있어 한국은 당시로는 대규모인 224명(임원 59명, 선수 165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직전 대회인 1960년 로마 올림픽에 67명의 선수단(임원 31명, 선수 36명)이 출전했으니 도쿄 올림픽에 대한 전 국민적인 관심을 헤아릴 수 있다.

대한체육회는 대회 준비를 위해 특별한 대책을 내놓았다. 대회를 2년여 앞둔 1962년 '우수 선수 강화 훈련단'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1963년 1월 31일 국민회당(현재 서울시 의회 건물)에서는 임원 63명, 선수 233명 등 386명으로 '우수 선수 강화 훈련단' 결성식을 가졌다. 요즘으로 치면 태릉선수촌에 입촌할 종목별 국가 대표 선수단을 구성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선수들을 수용할 시설이 당시 마련돼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한체육회는 동숭동 소재 건물(대지 212평, 건평 156평, 옛 서울대 문리대 뒷편)을 매입해 합숙 훈련을 실시했다. 1963년 6월 개소한 동숭동 합숙소는 그해 10월 여자부 숙소를 마련했고 이듬해 3월 서울운동장에 체력 훈련장을 개장했다. 태릉선수촌처럼 선수 숙소와 훈련 시설이 한 울타리 안에 있진 않았지만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 거리에 있어서 그 시절 나름대로 종합 훈련 센터로 구색을 갖췄다. '동숭동 시대'는 1966년 6월 28일 태릉선수촌(서울 공릉동 소재 대지 9786평, 건평 540평)이 개장하면서 3년여의 짧은 역사를 마감한다.

'우수 선수 강화 훈련단'은 도쿄 올림픽에 대비해 1963년 2월 1일부터 대회 직전인 1964년 9월 30일까지 4단계에 걸쳐 지속적으로 강화 훈련을 펼치며 종목별로 전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데모 등 당시 어수선한 정치 상황 때문에 훈련은 물론 국가 대표 선수 선발 대회까지 중단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도쿄 올림픽 한국 선수단은 재일 동포들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받으면서 종목별로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목표했던 금메달은 획득하지 못했고 정신조가 복싱에서, 장창선이 레슬링에서 각각 은메달을 차지했다. 유도에서는 재일 동포 김의태가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국가 대표 선수들을 체계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한 종합 훈련 센터의 필요성이 다시 한번 제기됐고 드디어 1965년 11월 서울 공릉동 일대 9,786평 임야에 3,300여만 원의 예산으로 태릉선수촌이 착공됐다. 이듬해인 1966년 6월 문을 연 태릉선수촌의 첫 번째 성과는 그해 12월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경기대회였다.

1962년 제4회 자카르타 대회까지 종합 3위 벽을 넘지 못하던 한국은 방콕 대회에서 개최국 태국을 제치고 처음으로 종합 2위에 올랐다. 메달도 복싱과 사이클, 사격, 역도, 탁구 등 종목별로 고르게 나왔다. 태릉선수촌의 위력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태릉선수촌은 한국 스포츠의 요람으로 수많은 우수 선수를 길러 냈다. 태릉선수촌은 오날 한국 스포츠를 있게 한 가장 큰 공로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집체 훈련의 문제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효율적인 선수 관리와 과학적인 훈련 방법으로 한국이 주요 국제 대회에서 빛나는 성적을 올리는 데 큰 힘이 됐다.

그런 태릉선수촌이 이제 진천선수촌에 바통을 넘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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