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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5 (토)

‘김과장’, 정유라에 회개를 촉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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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황진미의 TV 톡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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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과장>(한국방송2)이 인기리에 종영되었다. <김과장>은 회계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경리과장이 기업 비리에 맞서는 이야기를 담은 오피스 드라마다. 경제 범죄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시트콤을 보는 듯한 재미를 선사한다. 감각적이고 리드미컬한 대사에 남궁민, 김원해, 이준호, 동하 등의 호연으로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주제음악과 애니메이션을 활용한 마무리도 발랄함을 더한다.

그동안 오피스 드라마는 꾸준히 만들어졌다. 1980~90년대의 <티브이 손자병법>(한국방송2, 1987년)이나 <미스터 큐(Q)>(에스비에스, 1998년)는 소시민의 애환이나 직업적인 성공을 개인의 차원에서 그렸다. 2000년대 이후 만들어진 <직장의 신>(한국방송2, 2013년), <미생>(티브이엔, 2014년)은 비정규직, 정리해고, 하청, 갑을관계 등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그렸다. <김과장>은 재벌이 분식회계를 통해, 주식회사를 마치 범죄 집단처럼 운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동안 재벌가를 그린 드라마에서 주가조작이나 불법상속 등이 그려졌지만, ‘그들만의 리그’처럼 보일 뿐 우리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려주지 못했다. 하지만 <김과장>은 그들이 빼앗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택배기사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들의 임금이다.

재벌은 경영난을 핑계로 택배기사에게 벌과금을 매기고, 아르바이트생의 임금을 체불한다. 이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이 단체행동을 벌이자 폭력으로 저지하고 노조 간부를 매수한다. 그리고 무더기로 해고해버린다. 이들의 노동으로 벌어들인 돈은 회계조작을 통해 재벌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외국계 비밀은행이나 유령회사가 활용된다. 기업 비리에 대해 법은 무력하다. 감사는 형식적으로 이루어질 뿐이며, 검찰 조사를 받더라도 윗선에서 다 막아준다. ‘킹 메이커’로 불리는 거물 정치인이 고위 검찰 출신의 ‘설계자’를 통해 기업 비리를 막후에서 설거지해준다.

이런 거악에 맞서는 김 과장은 원래 선인이 아니다. 지방 조폭들의 장부를 조작해주며 ‘삥땅’을 치던 인물이다. 그가 대기업에 들어온 목적도 “더 많이 해먹기 위해서”이고, 기업이 그를 고용한 이유도 “쓰고 버리기 적당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김 과장이 우연한 계기로 ‘의인’이 되고, 이후 회사의 비인간적인 횡포에 맞서 싸움을 벌인다. ‘거악을 응징하는 차악’의 구도는 영화 <공공의 적>(2002년), <내부자들>(2015년), <추격자>(2008년), 드라마 <펀치>(에스비에스, 2014년) 등에서 보듯이, 한국 장르물의 전통이다. 그런데 <김과장>은 단지 장르로 이 구도를 활용하는 게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론을 설파하기에 이른다.

개과천선은 김 과장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서율(이준호)은 기업 비리를 전담하던 검사 출신으로, 대기업 재무이사가 된 뒤 법과 검찰 인맥을 활용하여 비리에 앞장선다. 소시오패스처럼 보이던 서율이 중반에 김 과장의 목숨을 구해주는데,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이유를 불문하고 구하는 서율에게 김 과장과 드라마는 개과천선의 기회를 준다. 회장 아들인 박명석(동하)도 초반에는 안하무인의 인물로 그려졌지만, 갈수록 아버지의 비리를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마지막 순간 가장 어려운 결단을 통해 자신이 상속받을 수도 있는 수천억의 비자금을 헐어 회사를 살린다.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기득권을 버린 것이다.

가장 평범한 인물들을 대변하는 추 부장(김원해)과 경리부 직원들도 변화한다. 그들은 잘못된 것에 길들여진 채 무력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김 과장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고 의미있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열정을 불태운다. 추 부장이 자신의 비겁을 탓하는 말을 하자, 김 과장은 “비겁하려고 비겁한 게 아니지 않냐. 누가 하나 툭 튀어나오면 그거 또 닮아 가고, 으싸으싸 하고 그런 거지”라 말한다. 요컨대 드라마는 김 과장이라는 개인을 영웅시하는 게 아니라, 악인이나 비겁자처럼 보이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기본적인 선함을 잃지 않으면 누구든 선인이 될 수 있으며, 평범한 이들이 용기를 얻어 각성해 나가며 서로 협력한다면 거악과 맞서 싸울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경제 범죄의 심각성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의 탄핵 사태를 겪으며 경각심이 높아졌다. 재벌과 ‘법꾸라지’들이 어떻게 평범한 사람들의 돈을 빼앗아 엄청난 부를 축적해왔는지 명쾌하게 보여주는 <김과장>이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드라마 외부의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만약 작년 이맘때 방영되었다면 ‘개연성 없는 판타지’라느니 ‘반기업적인 드라마’라며 외면받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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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와 현실은 서로 공명한다. <김과장>의 마지막 회에는 박 회장의 체포 장면이 담겼다. 검찰청에서 억울함을 항변하는 박 회장과 “염병하네”를 시전하는 청소노동자의 모습은 현실의 패러디이다. 박 회장에게는 징역 22년형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드라마가 끝난 지 4시간 만에, 박근혜가 구속되었다. 김 과장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부정부패 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 덴마크에 지금 정유라가 있다. 그에게는 박명석에게 주어졌던 것과 같은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 윤리적 결단을 내린다면, 그도 부모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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