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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슬럼프 빠진 타자들 ‘악마’를 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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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율 ‘폭풍 추락’ 박병호 등 타자들에게 악마처럼 찾아오는 슬럼프… 박정권 “원형 탈모”, 이병규 “알몸 스윙” 등 증세·극복법도 각양각색

경향신문

박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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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는 타자에게 ‘악마’처럼 다가온다. 예고 없이 찾아와 마음과 몸을 모두 망가뜨린다. KT 유한준은 “마치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자꾸만 몸이 빨려들어가는 모래 늪에 빠진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메이저리그 볼티모어에서 뛰었던 브래디 앤더슨은 팀 동료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한밤중 폭우 속에서 거침없이 달리는 동료에게 “내가 만약 지금 타율이 1할7푼8리만 아니었더라도 조금 천천히 가라고 할 거야”라고 말했다.

박병호(30·미네소타)가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다. 6월 타율은 1할3푼6리, 최근 11경기 타율은 5푼3리(38타수 2안타)밖에 되지 않는다. 같은 기간 장타율도 0.132에 머물고 있다.

통산 타율 3할4리의 이진영(KT)은 지난해 타율이 2할5푼6리에 그쳤다. 이진영은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다. 나만 힘들면 괜찮은데 집안 식구 모두가 내 눈치만 본다. 신경 써준다고 하는 건데 마음이 더 아프다”고 말했다.

리그 최고의 슬럼프 전문가는 단연 SK 박정권이다. 박정권의 별명은 ‘가을 정권’이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여름마다 괴롭혔던 지독한 슬럼프 때문이기도 하다. 박정권은 “4~5년째 이러고 있다. 나는 진짜 바닥을 봤다”면서 “지난해에는 머리에 원형 탈모가 다 생겼다”고 했다.

슬럼프에 빠지면 타자들은 ‘모든 짓’을 한다. 유한준은 “엄청나게 쳐보기도 하고, 정신없이 달려보기도 한다. 명상도 기도도 닥치는 대로 다 해봤다”고 말했다. LG 이병규(9번)는 잠을 자는 대신 벌거벗은 채 거울을 보고 스윙을 하기도 했다.

유한준은 오랜 시행착오 끝에 자기만의 비결을 하나 찾았다. 유한준은 “수첩에 슬럼프라고 생각했을 때 해보는 일종의 리스트를 적어뒀다. 안 좋을 때 그걸 1번부터 하나씩 해본다. 안되면 2번, 3번, 4번 순으로. 그러다 보면 돌아오는데, 어쩌면 슬럼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 리스트에 집중하는 효과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숭용 KT 타격코치는 “슬럼프의 1번 요인은 체력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자기도 모르게 몸이 늦어지고 타격 타이밍이 늦게 된다”고 말했다.

김재현 한화 타격코치 역시 “체력이 부족하면 배트 스피드가 느려진다. 스피드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양준혁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단거리 달리기를 많이 했다. 다리도 빨리 움직이지만 팔을 빨리 움직이는 데 집중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박병호는 슬럼프를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은 없지만 이진영은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벗어나 새 야구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하면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박정권은 “혼자 머리 싸매봤자 아무것도 안된다. 내가 4~5년 동안 배운 게 바로 그거다. 아무하고나 얘기해라. 야구 관계자가 아니라도 좋다. 아내는 물론 아이와도 얘기하는 게 좋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무슨 얘기든지 하면 뭔가가 풀리더라”고 말했다. 박병호를 오랫동안 지켜본 심재학 넥센 코치는 “슬럼프 때 가장 위험한 것은 자기가 쳐야 할 공에 방망이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이다. 절대 망설이지 말고 자신감 있게 휘두르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고 말했다.

슬럼프는 ‘악마’처럼 슬금슬금 다가와 옭아매지만, 어느 순간 구름이 걷히듯 사라진다. 박정권은 2할3푼9리에서 2군에 내려갔다 복귀한 뒤 지난달 29일 경기까지 최근 5경기 타율이 5할6푼3리(16타수 9안타)다. 29일 수원 KT전에서 박정권은 안타 4개를 때렸다.

박정권은 “도대체 얼마 만의 4안타 경기인지 모르겠다”면서도 “슬럼프가 끝났다고? 이제 안 올 거라고?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이런 경기를 하면 기분전환은 된다. 기분이 좋으면 모든 게 다 잘된다. 지금은 야구장에 올 때 가능한 한 유쾌한 마음으로 오려고 한다”고 말했다. 슬럼프라는 ‘악마’를 쫓아내는 가장 강력한 부적은 어쩌면 ‘유쾌한 웃음’이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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