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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초점] 일상은 하찮은 게 아니다…드라마 '미생'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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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서울=뉴시스】손정빈 기자 = "열심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안 해서인 걸로 생각하겠다.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세상으로 나온 거다.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버려진 것 뿐이다."

케이블 채널 tvN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임시완)는 이렇게 말한다. 바둑에 재능을 보여 어린 시절부터 프로 바둑기사가 되기 위해 바둑에 매진한 장그래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낙오했다.

과거 장면은 짧게 지나가지만 장그래를 꽤나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장그래는 바둑에 재능이 있었으며, 먼저 프로가 된 동료들보다 나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넌 우리보다 훨씬 잘했잖아"라는 대사) 그는 홀어머니와 산다. 아버지는 장그래가 어린 시절 죽었다. 그는 바둑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바둑을 공부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만 빼면 그는 바둑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프로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장그래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왜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이 대사는 드라마 '미생'에서 두 번 반복된다. 이유 없는 반복은 없다. 무심코 들으면 그저 조금 서글프게 들리는 이 대사에는 '미생'의 핵심이 담겨있다. 동시에 장그래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미생'은 삶의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이들에 대한 헌사다. 장그래는 이 무의미를 누구보다 '필사적으로' 의미로 바꾸려는 인물이다.

드라마 '미생'에 연일 찬사가 이어진다. 대개 '원작을 잘 살렸다' 혹은 '싱크로율 100%' 같은 말이다. 맞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 대한 환호를 이 정도로 정리하기에는 부족하다. 여기서 그친다면 '내 얘기 같다'는 격한 공감은 설명하기 힘들다.

'내 얘기 같다'는 말을 단순히 '직장인의 애환을 잘 담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성의하다. 드라마 '미생'이 정말 직장인의 애환을 그린 드라마인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장그래가 직장인인가. 4회까지 볼 때 장그래는 일개 인턴사원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는 대기업에 낙하산으로 들어온 고졸 인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그래는 비범함을 지녔다. 그의 회사생활은 극적이기까지 하다. 시청자는 도대체 어떤 부분에 공감한다는 것일까.

"열심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안 해서인 걸로 생각하겠다.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세상으로 나온 거다.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버려진 것 뿐이다."

이 이상한 공감을 알기 위해서는 장그래의 이 대사를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한다.

해석하면 이렇다. 장그래는 열심히 했지만 프로 바둑기사가 되는 데 실패했다. 실력이 부족해서는 아니다. 그는 바둑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집은 가난했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의 지원은 없었다. 장그래는 바둑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열심히, 정말 열심히 살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장그래가 바둑기사가 되지 못한 이유에 그의 잘못은 없어 보인다. 그는 열심히 살았다. 바둑도 열심히 뒀다. 근데 낙오했다. 이때 장그래의 십수년은 무의미해진다. '김동식 대리'(김대명)는 장그래에게 말한다. "아니 근데, 스물 여섯개 먹을 때까지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네? 아주 그냥 요즘 보기 드문 청년이야."

김 대리의 대사는 장그래를 보는 세상의 시선이다. 세상은 장그래에게 무관심하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세상은 관심이 없다. 이때 장그래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인가. 흔한 선택은 세상을 원망하고 스스로를 동정하다 정신적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장그래는 흔하지 않은 길을 간다. 삶을 스스로 짊어진다.

다시 말해 바둑 기사가 되지 못했던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기 시작하면 장그래의 현재는 '우연'으로 가득 찬다. 장그래가, 바둑을 두던 자신이 '원 인터내셔널'이라는 종합상사에 온 이유를 아버지의 죽음과 가난과 불운 등으로 외부화 하는 순간 삶은 통제 불가능한 것이 된다. 장그래의 삶이 장그래의 것이 아니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된다. 이 때 삶은 허무해진다.

하지만 장그래는 스스로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말로 자신의 과거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건 발악이다. 자기 합리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장그래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의 선택에 의해 혹은 나의 실수가 초래한 결과이기 때문에 미래를 수정해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의지다. 단순히 세계의 일부분이 아니라 단독자로서 세상에 단단히 발을 딛고 서겠다는 각오다.

원작자인 윤태호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미생'을 만든 이유에 대해 "저 큰 건물들 안을 밝히고 있는 직장인들의 생활이 무의미한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드라마 '미생'이 뛰어난 점은 윤태호 작가의 말을 충분히 소화하는 연출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취업에 성공한 순간에도 담담하던 장그래가 가장 기뻐했던 순간은 취업 이전, 영업3팀 '오 과장'(이성민)이 장그래를 '우리 애'라고 표현한 순간이다. '우리 애'는 장그래에게 전에 없던 소속이 생겼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 과장과 김 대리 그리고 인턴 장그래의 연대를 뜻한다. '함께 하는 일'을 '함께 하는 사람'이 됐다는 건, 삶의 무의미를 혼자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했던 장그래가 이 세상을 버텨낼 동료를 얻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생'의 동료애는 무의미를 의미로 바꾸는 이 힘겨운 과정을 누군가와 함께 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무의미에서 의미로의 전환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4회 장그래와 '한석률'(변요한)의 프레젠테이션 장면이다. 장그래는 한석률에게 사무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설득한다. 한석률은 장그래에게 현장의 경험을 강조한다. 이 장면에서 장그래는 과거 바둑 스승이 자신에게 "바둑판 위에 의미 없는 돌은 없어"라고 했던 걸 떠올린다. 그리고 장그래는 "우리는 모두 이로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현장은 한석률 씨가 생각하는 현장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확신합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하면 '우리는 모두 의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 의미는 사무실이나 현장 어디에서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가 될 것이다. 한석률은 장그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장그래가 영업3팀으로 돌아오자 오 과장은 장그래를 옥상으로 불러내 말한다. "이왕 들어온 거니까 한 번 버텨봐라. 여긴 버티는 게 이기는 데야. 버틴다는 건 어떻게든 완생(完生)으로 나아간다는 거니까. 바둑에 이런 말이 있어. 미생(未生), 완생. 우리는 아직 다 미생이야." 미생은 바둑에서 아직 두 집이 나지않아 말(馬)이 온전하게 살아 있지 못한 상태를 뜻한다. 이런 말은 끊임없이 공격을 당하면서 불안에 떨기 마련이다. 장그래든 오 과장이든 김 대리든 결국 회사 안에서 쉬지 않고 삶의 의미(완생)를 찾아나서는, 그리고 찾아내야만 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무의미를 의미로 바꿔 나가는 작업을 끊임 없이 해야하기에 미생이다. 이것이 드라마 '미생'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이유다.

jb@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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