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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이 바다에선… "내가 제일 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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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아시안게임 D―21] 요트 윈드서핑 국가대표 이태훈의 희망가

- 월드컵서 첫 金 딴 기대주

결혼 1년 신혼 꿈도 접고 손엔 물에 부르튼 굳은살

"바람 읽는 능력이 승패좌우… 서해는 내가 제일 잘 알아"

"바람 냄새를 잘 맡는 배가 빨리 나갑니다. 한국 바닷바람 냄새는 제가 제일 잘 알죠."

28일 인천 영종도 왕산 요트경기장에서 만난 국가대표 이태훈(28·보령시청)은 인천아시안게임 남자 요트 RS:X(윈드서핑)급의 강력한 우승 후보다. 국내 일인자인 그는 지난해 5월 네덜란드 메뎀블릭에서 열린 ISAF(국제세일링연맹) 5차 월드컵 RS:X급에서 한국 최초로 금메달을 땄다. RS:X급 경기는 선수들이 높이 5.2m, 길이 2.8m의 요트를 타고 10번 이상 경주를 벌여 각 경기 점수를 합산해 승자를 가리는 방식이다.

서해에서 한바탕 레이스 훈련을 벌이고 육지로 돌아온 이태훈과 악수를 하자 바닷물에 부르튼 손의 굳은살이 다 벗겨져 있었다. 쑥스러운 듯 손을 감춘 그는 "바다에서 온종일 붐(boom·손잡이)을 잡고 훈련하다 보면 요트 선수들 손은 다 이렇게 된다"며 "굳은살이 너무 많으면 붐을 잡기가 쉽지 않아 한 달에 한 번 정도 칼로 도려낸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요트 국가대표 이태훈이 28일 인천 왕산 요트경기장에서 훈련하고 있다. 인천아시안게임 남자 요트 RS:X(윈드서핑)급의 금메달 후보인 이태훈은“4년 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는 급하게 경기 운영을 하느라 동메달에 그쳤지만, 이번엔 내 인생의 마지막 경기라고 생각하고 경기에 임하겠다”고 말했다. /이덕훈 기자


경남 거제도 출신인 이태훈이 처음 요트를 시작한 것은 신현중학교 3학년 때인 2000년 여름이다. 학교 수영선수였던 이태훈은 도 대회에 나갔다가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거제도 사곡리 해수욕장에서 빠른 속도로 바다를 가르는 요트를 처음 보게 됐다. 마침 사곡리 요트 동호회에서 활동하던 체육 선생님이 호기심 가득한 제자를 요트에 태웠다. 이태훈은 "바람만을 이용해 이리저리 바다를 떠돌아다니면서 '물고기'가 된 것 같았다"며 당시 느낌을 전했다.

이태훈이 요트의 길에 들어서면서 넘어야 했던 첫 파도는 바로 부모님이었다. 어릴 때부터 축구·테니스·수영 등 할 것 없이 하고 싶다던 운동을 막상 시키면 곧바로 싫증을 느껴 하기 싫다고 투정을 부린 아들을 못 미더워하던 부모님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태훈은 일부러 기말고사 시험지를 백지로 제출하며 무언의 시위를 했다. 그 작전이 통하지 않자 그는 대신 부모님의 서명을 자신이 써 요트부에 가입했고, 매일 4교시만 마친 뒤 사곡리 요트장에서 배를 탔다.

이태훈은 겨울 전지훈련을 앞두고 어머니에게 거짓 서명 사실을 털어놨다. 300만원 넘게 드는 동남아 전지훈련 통지서까지 부모님 서명을 대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크게 혼날 생각하고 통지표를 갖다 드렸는데 어머니께서 의외로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게 생겼나 보구나' 하시면서 허락을 해주셨어요. 아버지께서도 그때부터 든든한 후원자가 돼주셨죠."

거제도 조선소에서 감독관으로 일하는 이태훈의 아버지 이성신(59)씨는 매년 1000만원이 넘는 장비와 전지훈련 비용을 댔다. 성인 선수들도 경비 문제 때문에 출전하지 못하는 국제 대회에 아들을 내보냈다. 이태훈은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선수와 겨뤄본 경험이 하나하나 자신감으로 쌓여갔다"고 말했다.

국내 대회를 휩쓸며 유망주로 주목받던 이태훈은 2003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선수권에 출전해 미스트랄급 11위를 기록했다. 첫 아시안게임이었던 2010년 광저우 대회 남자 요트 RS:X급에선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1 싱가포르 아시아선수권과 2012 태국 아시아선수권에서는 모두 준우승을 거뒀다.

삼십대를 바라보는 이태훈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태훈은 "요트 선수에게 체력보다 중요한 것은 바람을 읽는 능력"이라며 "바람을 읽는 능력도 수십 년에 걸쳐 길러진다. 요트 선수의 전성기가 서른 살부터라고 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이태훈은 지난해 11월 고등학교 1년 후배와 결혼식을 올렸다. 인천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며 합숙소 생활을 하느라 달콤한 신혼생활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그는 이번 대회 금메달이 더욱 간절하다. 그는 4년 전 중국 광저우대회에서 금메달을 자신했지만,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동메달에 그쳤다.

"아시아 정상에 서보겠다는 목표도, 금메달로 국민을 기쁘게 해 드리겠다는 생각도 없이 오로지 병역 혜택만 바라본 채 급하게 경기 운영을 했던 것이 패인이었던 것 같아요."

아직 군대에 가지 않은 이태훈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내 인생의 마지막 경기라고 생각하고 요트를 몰겠다"고 각오를 내비쳤다.

[영종도(인천)=윤동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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