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전 ‘흐르는 풍경, 쌓인 형태’가 열리고 있는 대구 우손갤러리 1층 전시장. 건축물에서 얻은 감성을 풀어낸 황원해 작가의 추상 회화들이 바람구멍을 뚫어 소리를 내는 문이삭 작가의 원통 모양 조형물과 마주보고 있다. 노형석 기자 |
한여름, 가마솥더위로 유명한 대구의 미술판은 뜨겁고도 서늘하다.
지금 대구에선 현대미술 향연이 한창이다. 달항아리를 해체한 덩어리로, 뜯긴 도로를 피부처럼 묘사하며 빌딩의 이미지를 감정과 뒤섞어 추상그림으로 만드는 소장 작가들의 난장이 중구 도심에서 펼쳐지고 있다. 북구 변두리 동네에선 서구 명문 미술관을 방불케 하는 기하학적인 전시공간에 1960~70년대 현대미술사를 휘저었던 프랑스 전위 작가 그룹 쉬포르 쉬르파스의 기운 드센 구작들이 무더기로 나와 애호가들의 눈길을 빨아들이고 있다.
소장 작가 김세은, 김정은, 문이삭, 이승애, 황원해씨가 고원석 기획자와 함께 만든 기획전 ‘흐르는 풍경, 쌓인 형태’(8월23일까지)는 중구 봉산문화길의 우손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다. 동시대 젊은 작가들이 도시에 대해 느끼는 다기한 갈래의 감각을 화두로 삼은 이 전시는 기존 회화나 조각의 상식적 틀을 벗어난 표현 양상이 돋보인다. 1층에서 만나는 황원해 작가의 회화들은 작가가 성장하면서 지금까지 관찰하고 겪은 근현대 건물들의 이미지에서 느낀 감성과 건물들 사이 흐르는 기운을 담았다. 벽돌과 커튼월 유리로 외형을 꾸린 건물들의 형상을 살리는 구상적 이미지와 건물에 대한 작가의 내면적 인상, 이미지를 해체한 뒤 재구성한 추상적 화면 등이 여러 층으로 겹을 이루면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빌딩과 빌딩 사이를 지나는 바람이나 에너지의 기운을 형상화하려한 최근의 추상적 작업 등도 이채롭다. 건물 사이를 지나는 바람이나 개인의 감정 등 흐름의 밀도가 드러나는 추상성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황 작가의 건축 회화와 짝을 이루며 바닥에 놓인 문이삭 조각가의 ‘버스트-바람길’은 흙과 나무를 통으로 쌓아 올린 조형물인데 곳곳에 숨을 불어넣어 소리를 내는 구멍이 뚫려 일종의 피리 구실을 하면서 현대 도시를 감싼 기운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인지하게 해준다.
대구 우손갤러리 2층 전시장. 코로나 팬데믹 시기 고립된 도시 공간의 기억을 담은 이승애 작가의 흑연 드로잉 영상물이 안쪽 벽면에 투사되고, 그 앞에는 옛 달항아리를 다양한 재질의 흰빛 점토들을 섞어 낯선 덩어리들로 재해석한 문이삭 작가의 ‘흰달’ 연작들이 놓였다. 노형석 기자 |
2층에 내걸린 이승애 작가의 흑연 드로잉 탁본 회화와 이를 바탕으로 한 영상물은 코로나 팬데믹 시기 자신이 머물다 온 영국 런던과 서울 두 도시의 기억들을 다룬다. 실내 공간의 여러 집기와 빛을 내며 울리는 휴대폰 등이 초현실적으로 배치된 고립 공간을 부각시키는 작품들은 도회적 공간에서의 고독과 상실감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 김정은 작가는 자신이 날마다 걷는 길을 지도 위에 점으로 연결해 하나의 면을 만들고 이 면을 수십일 쌓아 만든 작품들을 통해 촉지의 감각을 일종의 기호 덩어리로 바꿔놓았다. 사람의 살갗이 벗겨진 모양새로 파헤쳐진 도시 도로의 모습을 표현하고 움직이는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풍경을 속도감 있는 색면회화로 나타낸 김세은 작가의 근작들도 있다.
프랑스 전위 예술그룹 ‘쉬포르 쉬르파스’ 작가 13명의 회고전을 차린 대구 인당뮤지엄 1층 들머리 공간. 정면 위쪽 벽에 노엘 돌라의 ‘염색한 탈라탄 면직물’(1979)이, 바닥에는 루이 칸의 겹쳐진 유화 작품인 ‘벽/벽’이 깔려 있다. 노형석 기자 |
북구 영송로에 자리한 대구보건대 경내 인당뮤지엄에서는 1960~70년대 유럽 전위예술의 기수였던 쉬포르 쉬르파스 그룹 작가 13명의 회고전이 8월13일까지 열리는 중이다. 1960년대 유럽 학생 혁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기존 미술의 고루한 관념을 뒤집으려 했던 당시 프랑스 청년 전위작가들의 실험적 작업들을 층과 단을 달리한 공간들에 내걸고 놓아 보여준다. 화폭을 찢고 그림틀을 뒤흔들고 작품 배치 장소를 전시장 이외 공간으로 확장하는 등의 방식으로 실험적 회화와 설치 작업의 개념틀을 제시했던 이들의 작업은 서구는 물론 아시아의 70년대 실험미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클로드 비알라, 루이 칸, 노엘 돌라 등 당시 운동을 주도한 프랑스 작가 13명의 작품 55점이 대규모로 한국에 전시된 것은 처음이다.
프랑스 전위 예술그룹 ‘쉬포르 쉬르파스’ 작가 13명의 회고전을 차린 대구 인당뮤지엄 2층 난간 전시공간. 난간 너머 왼쪽 벽에 루이 칸의 ‘깎아낸 유화 캔버스’(1974)가, 오른쪽 안벽에는 나무틀과 색유리판을 조합한 피에르 뷔라글리오의 설치회화 ‘창문’(1981)이 붙어 있다. 노형석 기자 |
화폭이나 조형물에서 재료와 구조 자체로 의미와 미학을 표추하며 무엇보다 작품 스스로 실존하게 만들려는 의지가 느껴지는 작품들이 많다. 계단과 복도로 진입할수록 공간의 모양새가 바뀌고 한 작품을 다른 공간의 각도에서 조망할 수 있게 하는 서구 현대미술관 스타일의 다면적인 전시공간이 감상의 박진감과 재미를 배가시킨다.
대구 인당뮤지엄 1층 카페 공간 안벽에 내걸린 클로드 비알라의 전위 회화인 ‘1977/042’(1977). 파라솔 천 위에 아크릴물감으로 채색했다. 노형석 기자 |
대구/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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