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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논란'에 파묻힌 여성 정책…다음 여가부 장관 청문회에 기대하는 것은 [젠더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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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논란'에 파묻힌 여성 정책…다음 여가부 장관 청문회에 기대하는 것은 [젠더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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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살롱] 잃어버린 3년 되돌릴 과제
'비동간' 개정 2018년 첫 제기 뒤 답보
여권 "도입 시기상조" 여론 눈치 보지만
"개정 공감대 충분… 논의 장 만들어야"
"성별 임금격차 10%p 감소 목표" 제언도

편집자주

한국일보 기자들이 직접 여러 사회 문제와 주변의 이야기를 젠더적 관점에서 풀어냅니다. '젠더, 공간, 권력' 등을 쓴 안숙영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의 글도 기고로 함께 합니다.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여성가족부 후보자였던 지난달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의원 질의를 듣고 있다. 뉴스1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여성가족부 후보자였던 지난달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의원 질의를 듣고 있다. 뉴스1


지난달 14일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는 향후 이재명 정부의 젠더 정책 구상을 엿볼 수 있는 주요 창구였습니다. "여가부 폐지"를 내세웠던 윤석열 정부 3년 동안 무너진 성평등 정책을 어떻게 회복할지 등이 논의돼야 했죠.

하지만 정책 토론은 사실상 실종됐습니다. 강선우 여가부 장관 후보자의 '갑질 논란' 문제에 온 시선이 집중된 탓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관련 질의를 하긴 했지만, 후보자 갑질 논란을 무마하기 위한 '꼼수'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강 후보자는 결국 지난달 23일 자진 사퇴했습니다. 다음 장관 후보자, 그리고 청문회만큼은 본격적인 여성 정책 회복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더 커졌습니다. 어떤 정책이 시급하게 논의돼야 하는지, 젠더 정책 전문가들에게 물었습니다.

"비동의강간죄 도입 논의해야"



여성단체 활동가들이 2019년 9월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성단체 활동가들이 2019년 9월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강간죄 개정 과제를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며 비동의강간죄 도입 논의를 1순위 의제로 꼽았습니다. 강간죄 성립 요건을 '가해자의 폭행 또는 협박'으로 규정한 현행 형법 조문을 '동의 여부'로 바꿔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주장 배경에는 미묘한 권력관계가 작용하는 성범죄의 특성을 현행법이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권력·금전 등 위계를 악용하거나 위압적 분위기를 조성한 채 끈질기게 회유하는 등의 사례가 해당합니다. 실제 지난해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성폭력 상담을 신청한 218명 중 폭행·협박이 있었다고 한 사람은 28명(12.8%)에 불과했습니다. 최근에는 재판부가 법을 좀 더 폭넓게 해석한다지만, 법 조문이 그대로인 상황에서 나머지 190명은 굉장히 복잡한 법적 다툼을 감수해야 합니다.

물론 반발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동의'의 기준이 모호해서 합의가 된 줄 알았는데 상대방이 말을 바꿔 고소를 하는 상황이 나올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강 후보자 또한 인사청문회 서면 답변을 통해 "입증책임의 전환 우려 등을 이유로 반대 의견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반대 여론 눈치를 보는 듯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2018년 '미투(Me Too·권력형 성범죄 피해 폭로)' 운동 뒤 논의가 시작된 법안이 아직까지 통과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부작용 우려가 도입 필요성까지 뒤엎는 것은 아닙니다. 배미란 울산대 법학과 교수는 "명시적 폭행 협박이 없어도 성범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데에는 사실상 모두가 동의하는 상황"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여러 찬반 의견을 연구해 본 결과 우리 사회 성인식 수준이 법 개정 필요성을 부인할 정도로 낙후되지는 않았으며, 여가부가 세부적인 법조문 관련 이견을 해소하기 위해 강도 높은 논의를 이끌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배 교수는 "일본은 비동의강간죄 도입 전 학자 의료진 시민사회 등이 모두 참여해 심도 있게 논의했다"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김 소장도 "여가부가 피해자 또는 성범죄 판례 등에 대한 실태 조사에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여성 정책 기능 회복" 촉구도



지난해 12월 11일, 윤석열 당시 대통령 탄핵소추안 통과를 촉구하는 시민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K팝 아이돌의 '응원봉'을 들고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해 12월 11일, 윤석열 당시 대통령 탄핵소추안 통과를 촉구하는 시민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K팝 아이돌의 '응원봉'을 들고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윤석열 정부에서 유명무실화된 여성 정책 기능을 되살려야 한다는 요구도 쏟아졌습니다. 문재인 정부 시기였던 2018년 9월 발족했던 국무총리 산하 양성평등위원회 무력화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각 부처의 여성 정책 컨트롤타워 역할을 위해 설립됐지만 윤석열 정부 시기에는 사실상 존재감을 완전히 잃었죠.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대부분 형식적인 서면 논의뿐이었다"며 "여성정책 발굴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 빈곤은 저출생 문제와도 직결되는 문제"라며 성별 임금격차 해소를 촉구했습니다. 수십 년째 여성의 임금이 남성의 60~70%대에 머무는 상황을 해소하지 않는 한 여성 빈곤 문제도, 그와 구조적으로 연결된 저출생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신 교수는 "이재명 정부가 임기 내 성별 임금격차를 최소 10%포인트라도 줄이겠다 등 각오를 세워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성소수자 인권 문제 또한 주요 논의 과제입니다. 윤석열 정부는 성소수자 혐오 인사를 국가인권위원장에 임명하는 등 완고한 차별 정책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는 사실상 '올스톱'됐고, 보수 개신교계의 반발도 커졌죠. 최근에는 조인철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온라인상 혐오 표현 규제 대상에 '성적 지향' 문구를 포함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발의했다가 개신교계 항의를 받고 철회하는 사태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민사회는 '그래도 진보 정부는 다르지 않겠느냐'는 데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한국성소수자인권단체연합 무지개행동 공동대표인 박한희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윤 정부 땐 아예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며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광장'에서도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가 제기됐던 만큼 보다 성숙한 논의와 입법이 가능하길 기대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김현종 기자 bell@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