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인공지능(AI) 3대 강국'을 목표로 전략 수립에 나선 가운데 현장에서는 자체 모델 개발을 넘어 '버티컬 AI' 생태계 확장에 민관이 함께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30일 매일경제가 한국인공지능·소프트웨어산업협회(KOSA)와 함께 국내 AI 관련 기업 103곳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AI 경쟁력 강화를 위한 최우선 정책 과제로 '제조·의료 등 산업 현장에 AI 적용 확대'를 꼽은 기업이 32%로 가장 많았다. 대규모언어모델(LLM) 중심이던 글로벌 AI 경쟁 구도가 서비스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는 만큼 AI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버티컬 AI 역량 강화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버티컬 AI는 특정 분야에 전문화된 AI 솔루션을 말한다. 상대적으로 적은 양이어도 특정 분야의 전문지식과 데이터를 학습해 최적화된 결과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양질의 데이터와 현장 노하우가 중요하다. 설문에 참여한 한 기업 대표는 "한국이 세계적 경쟁력을 보유한 제조업과 콘텐츠 등 분야에서 특화 AI 개발에 집중하면 충분히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면서 "기업들이 각자 영역에서 경쟁력 있는 AI를 발굴하고 상품화하는 데 정부 지원이 집중돼야 한다"고 말했다.
'규제 정비 및 유연한 정책 설계'를 우선 과제로 꼽은 기업은 22.3%였다. 업계에서는 특히 데이터 규제 정비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크다. 의료 분야가 대표적이다. 미국에서는 비식별화 과정을 거친 의료 데이터를 민간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한 덕에 선도적인 AI 헬스테크 기업이 쏟아지고 있지만 한국은 데이터 사용에 대한 명확한 법적 기준이 없어 의료 AI 개발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한 헬스케어 기업 대표는 "의료 데이터를 AI 학습에 활용하는 데 있어 법체계가 모호한 데다 AI 기본법 역시 아직 정비되지 않은 상태라 서비스 개발 단계마다 매번 외부 로펌을 통해 법률 리스크를 점검하고 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고급 AI 인재 양성 및 확보'(20.4%)도 주요 정책 과제로 꼽혔다. 한 AI 기업 대표는 "인재 육성 관련 구호만 요란할 뿐 대학·대학원 교과 개편이나 산업현장의 인력 수요·공급 매칭 등 목표 달성을 위한 구체적 방안은 없는 상태"라며 "지난해 기준 국내 AI 석박사 졸업자 중 40%가량이 해외로 유출됐고, 중소·중견기업은 충원난을 호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존 인력들의 AI 직무 전환을 위한 교육비용 지원이나 AI 직무 전환 인력의 고용 유지 인센티브 등 정부 차원에서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제안도 나왔다.
이재명 정부에서 약속한 AI 100조원 투자를 집행할 때 가장 우선시해야 할 분야를 묻는 질문에는 절반 가까운 기업이 '산업별 AI 융합 프로젝트'(49.5%)를 꼽았다. AI를 통한 혁신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되는 분야를 묻는 질문에도 '산업·제조'라고 답한 기업이 31.1%로 가장 많았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AI 투자에 따른 수익률이 가장 높은 분야는 제조업"이라며 "AI는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면서 생산성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말했다. 제조업에 AI를 접목해 업무 효율을 크게 개선한 사례로는 LG생활건강이 꼽힌다. LG생활건강은 "기존에는 후보 물질을 선정하는 데 평균 1년10개월이 소요됐지만 LG AI연구원의 신물질 발굴 특화 AI 모델 '엑사원 디스커버리'를 활용해 단 하루 만에 후보 물질을 발굴했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AI 정책을 설계·집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원칙을 묻는 질문에는 '실증 기반의 정책 설계와 신속한 실행'(35.9%), '장기적 비전과 정책의 일관성 유지'(25.2%)를 꼽은 기업이 많았다.
[고민서 기자 / 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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