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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스타인 '성접대 리스트', 들통난 트럼프 거짓말 [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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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스타인 '성접대 리스트', 들통난 트럼프 거짓말 [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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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으로 세력키운 트럼프
'딥스테이트' 음모론에도 편승
거짓 드러나면서 정치적 위기


마가 모자를 쓰고 연설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위스콘신=로이터 연합뉴스

마가 모자를 쓰고 연설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위스콘신=로이터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음모론자다. 단순히 음모론을 믿는 수준을 넘어서, 직접 이를 퍼뜨리고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인물이다. 미국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되려면 ‘태어날 때부터’ 미국 시민이어야 한다. 트럼프는 2011년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이 아닌 케냐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헌법상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며, 그의 임기 자체가 불법이라고 몰아붙였다. 오바마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1961년에 태어났고, 하와이 주정부가 그의 출생 증명서를 공개했지만, 트럼프는 되려 그 문서가 조작됐다고 반박했다.

근거 없는 음모론이었지만, 인종적 편견을 자극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는 성공했다. 오바마의 중간이름 ‘후세인’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며, 그가 IS(이슬람 국가)를 만들고 지원했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2020년 대선에서 패배한 이후에는 선거 결과가 조작됐다는 음모론을 내세우며 대선의 정당성을 공격했다. 수십 건의 소송이 모두 기각됐고 증거도 없었지만, 이 음모론은 정적을 공격하고 지지층을 결집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미국에서 유행하는 대표적인 음모론 가운데 하나는 ‘딥스테이트(Deep State)’ 이론이다. 이 주장은 정부 내 숨겨진 권력 집단이 국가 정책과 정권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며 실질적 권력을 행사한다고 본다. 트럼프는 자신을 이 딥스테이트 세력과 맞서 싸우는 ‘아웃사이더’로 묘사했고, 이를 통해 지지층의 결속을 강화했다.

2017년 초에 시작된 ‘큐어넌(QAnon)’은 온라인 음모론의 집합체로, 딥스테이트 이론이 그 중심에 있다. 익명의 인물 “Q”가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리면서 시작된 큐어넌은, 트럼프를 딥스테이트로부터 나라를 구할 ‘구원자’로 묘사했다. 큐어넌 지지자들은 2021년 1월 6일 미국 의사당 폭동 사태에 대거 참여했으며, 이에 대해 트럼프는 “그들이 나라를 사랑한다고 들었다”라며 사실상 감싸는 태도를 보였다.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인 ‘마가(MAGA: Make America Great Again)’가 모두 큐어넌 지지자는 아니지만, 그들 중 상당수의 세계관에는 ‘딥스테이트’와 각종 음모론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제프리 엡스타인의 성범죄와 죽음의 배후에는 딥스테이트가 있다고 굳건히 믿고 있다. 엡스타인이 정·재계 엘리트들에게 미성년자 성 접대를 제공했고, 그 명단이 공개되는 것을 두려워한 딥스테이트 세력이 그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2024년 대선에서 재집권하면 ‘딥스테이트의 은폐’를 끝내고 엡스타인 파일을 공개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자신을 딥스테이트와 싸우는 아웃사이더 영웅으로 내세우며, '마가' 진영의 결집을 끌어내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지난 8일, 법무부와 FBI는 엡스타인 고객 명단은 존재하지 않고 그의 사망은 자살로 결론을 내렸다. 사건과 관련된 자료는 피해자 보호 차원에서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딥스테이트 이론을 신봉하는 '마가' 진영은 지금 트럼프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단순히 거짓 공약 때문이 아니다. 트럼프가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쯤은 마가 내부에서도 이미 익숙하다. 그들이 분노하는 진짜 이유는, 트럼프가 자신들의 세계관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최근 “엡스타인에게 시간 낭비하지 말자”, “지루한 이야기”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딥스테이트의 존재를 사실상 부정하는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 마가 지지층의 음모론적 신념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다.

궁지에 몰린 트럼프가 꺼내든 카드는 또 다른 음모론이었다. 그는 오바마가 FBI와 정보기관을 동원해 ‘러시아 게이트’를 날조했으며, 이는 자신을 약화시키려는 쿠데타였다고 주장했다. 마가 진영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시도로, 엡스타인 논란에서 시선을 돌려 오바마를 새로운 표적으로 삼으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그 효과는 미미한 것으로 보인다.

마가 진영이 기대했던 ‘엡스타인 리스트’는 실존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다수의 유력 로펌, 대형 언론사, 탐사보도 기자, 그리고 정부 조사기관들이 수년간 추적해왔지만, 결정적 명단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엡스타인이 빌 클린턴, 빌 게이츠, 리처드 브랜슨 등 정·재계 유명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들이 엡스타인의 ‘고객’이었다는 주장에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엡스타인의 죽음을 둘러싼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는 음모론이 퍼졌지만, 검시 결과와 교정시설 기록 등을 종합하면 타살 가능성은 작다. 결국 트럼프가 엡스타인 관련 자료를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그 내용이 딥스테이트의 존재를 입증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게다가 자료 속에 자신의 이름이 다수 언급되어 있었다면, 트럼프로서는 공개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음모론자들의 특징 중 하나는, 절대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련된 유머가 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음모론자가 세상을 떠나 천국에 도착했다. 천국 문 앞에서 하나님이 그를 맞이하며 말했다. “진실을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질문을 해보렴.” 그는 주저 없이 물었다. “누가 케네디를 죽였나요?” 하나님은 조용히 답했다. “리 하비 오스왈드가 단독으로 저지른 일이란다.” 그러자 그 남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하나님까지 진실을 숨기다니.”

하나님의 진실조차도 음모론자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풍자다. 음모론은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음모론으로 이어지고, 그 믿음은 어떤 설명으로도 흔들리지 않는다. 정치에서 음모론은 지지층을 결집하는 데는 유용할지 몰라도, 그 기반이 허약한 만큼 오래가지 못한다. 음모론으로 흥한 자는 결국 음모론으로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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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천 서강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