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을 벗으니 나비처럼 가벼운지요.
여기저기 쑤시던 고통도 씻은 듯 깨끗한지요.
돌아보면 저기 어디, 저 문밖에 두런두런 누구와 얘길 하고 있을 성 싶게,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는 것처럼 '아니, 나 여기 있는데, 뭣들 하는 거여?' 그 특유의 환한 웃음으로 금방 들어설 것도 같은데.
이별이란, 아무리 불러도 영영 대꾸가 없는 거라더니, 돌아보면 어느새 창밖으로 무심한 하늘뿐이라더니, 정말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서고 계신 건지요.
부모님과 함께 살던 효촌 고향집, 와우산 기슭 대성여중, 대성여상, 평생을 몸담았던 대학은 둘러보셨는지요, 중앙공원 압각수 밑엔 다시 앉아보셨는지요.
어느 봄날 우영 선생님과 함께 했던 칼국수는 생각나는지요.
초행길이 설진 않은지요.
'우리 승빈 아우야, 땅 한 평 못주고 보잘 것 없는 책 한 권 준다.'던 수필집 '땅 한 평, 책 한 권'이나 트레이드 마크였던 개똥모자가 들어있는 '개똥모자에 핀 구름꽃' 등 좋은 글도 많이 쓰셨지만, 청주의 르네상스라 할 만큼 청주문화원을 통해 많은 문화사업을 전개하고 '딩아돌하문예원'에서 '신동문문학제'를 열기도 하고,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화관장을 받으시기도 했지만, 우리들 가슴 속에 당신은 역시 언제나 박수선생이십니다.
"내 이름이 박영수요.
그런데 가운데 '영'자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일 수도 있으니까 빼버리면 '박수'가 됩니다.
그러니 자, 다들 나와 함께 박수나 한 번 칩시다."라면서 어느 침울한 분위기를 일소하신 것처럼 당신은 언제나 격려와 칭찬으로 주변을 일으키는 박수선생이셨습니다.
그 박수를 통한 격려가 제게도 얼마나 큰 힘이었는지요.
종지그릇인 저를 당신은 만나는 사람마다 이만한 대접이라 소개하는 바람에 그 종지와 대접의 간극을 채우려고, 얼마나 자신을 부추겨 일으켰는지요.
그런 점에서 훌륭한 문화예술인이면서 동시에 당신은 지역의 후배들을 키우고 격려하는 큰 어른이셨습니다.
챙기고 보듬어야 할 후배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삶은 넘치는 인정과 눈물로 따스한 햇살이 몇 백관, 빛나는 별빛이 한 섬이었습니다.
효송孝松 박영수朴永洙 선생님.
아니 큰 형님.
이제 가셔도 당신은 언제나 저와 우리들 가슴에 영원하실 겁니다.
하늘의 은총 속에 언제나 천복天福하소서.
언제나 부족한 후배 임승빈 곡哭 임승빈 청주대 명예교수·박영수 전 청주문화원장장례집행위원장 효송,박영수,추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