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1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2024 서울마라톤에 참가한 선수들이 출발하고 있다. 연합뉴스 |
“으아아아아” 갑자기 앞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소리를 질렀다. 2013년 3월, 처음 서울 국제 마라톤을 참가하여 신답지하차도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서울 국제 마라톤 코스는 광화문에서 출발해 동대문을 돌아 나와 청계천을 왕복하고, 종각, 흥인지문, 신설동 오거리를 지난다. 그리고 하프 통과 후 24km쯤 신답지하차도를 통과해 달리는데, 지하차도로 내려가는 내리막 구간에서 상대적으로 숨이 편안해지고 달리기도 수월해진다. 그리고 지하차도에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는 오르막 구간은 조금 고되다. 전반 하프를 달리며 누적된 피로감에 오르막길을 달려서 올라가는 동안 숨도 차고 다리가 무거워 고비를 느끼게 되는 구간이다.
마라톤 ‘샤우팅 구간’이 기다려지는 이유
2시간 이상 마라톤을 진지하게 달리던 중 갑자기 모두 다 함께 소리를 크게 내지르다니. 나는 처음 맞닥뜨리는 장면에 생경하면서도 반가운 마음이 들어 곧장 “으아아아아” 함께 소리를 내질렀다. 지하차도 안에서 소리가 크게 되울리며 진동이 몸에도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소리를 지르는 동안 나만 힘들고 고되게 느끼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힘들지만 이겨내며 달리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이어 마음의 긴장이 풀리며 몸도 가벼워졌다. 내리막 이후 이어지는 언덕을 올라갈 때, 숨차고 다리가 무거워 힘들게 느낄 수도 있지만 순간적인 힘에 짧은 순간이지만 경쾌하게 느껴졌다.
이후 매년 서울 국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때 신답지하차도 이후 오르막길, 경사도 높은 구간이 긴장도 되지만, 함성을 내지르는 순간이 기대된다. 많은 마라톤 참가자들이 이 구간에서 소리를 지르며 레이스 전반의 긴장과 피로를 풀어내고, 바로 이어질 오르막과 이후 후반 레이스를 지속할 힘을 얻는 것 같다. 대회가 아니어도 달리면서 숨차고 고될 때 “으아아아” 소리가 절로 나온다. 운동하다가 힘들다고 느껴질 때 “아자!” 기합을 넣기도 하고 “할 수 있다!” 큰 목소리로 외치기도 한다.
공포·긴장감 상쇄시키는 ‘기합’의 힘
두렵고 긴장되는 마음일 때 소리를 내지르거나 기합을 넣으면 몸과 마음이 위축되지 않고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다. 마치 전투에서 싸울 때 소리를 지르며 출전하는 것처럼 공포와 긴장감을 상쇄시킨다. 또 힘들고 버티기 어려울 때 소리를 지르면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을 잊고 남아 있는 힘을 끌어모은다. 우리 조상들도 모내기를 하거나, 길쌈할 때, 무거운 그물을 끌어올릴 때 노동요를 불렀다. 소리를 내고 박자를 맞추면서 흥을 돋아 지루하고 힘겨운 작업의 고단함을 잠시 잊었다. 과거 미국 남부 목화 농장에서 일하던 흑인 노예들도 노래를 부르며 서러움과 고통을 상쇄했고 흑인 영가로 남아 있다. 달릴 때도 옆의 러너와 대화를 나누거나, 음악을 듣거나, 기합을 넣으며 힘듦을 잠시 잊고 긴장감을 낮출 수 있다.
마라톤 대회 중 함성 구간이나 샤우팅 코스는 가을에 개최되는 춘천 국제 마라톤 대회에도 있다. 춘천 마라톤 대회에서는 의암호 신연교를 지나 8km 구간 터널에서 함성을 지르는 게 일종의 전통이자 의식으로 자리 잡혔다. 공지천 인조잔디구장을 출발해서 의암댐과 춘천댐 사이의 의암호 둘레를 달리는 춘천 마라톤은 유난히 업힐 구간이 많고 힘이 든다. 터널을 통과하며 수백 명의 러너와 함께 소리를 지른다. “아아아아”, “가자”, “파이팅” 함성을 지르면 그 소리가 터널 안에 장엄하게 울려 퍼진다. 공명으로 인한 에너지에 마음이 열리고 긴장으로 경직되었던 몸도 점점 풀린다.
2024년 런던 마라톤을 달릴 때 24마일(38km) 구간의 블랙프라이어스 지하도를 통과할 때도 전 세계에서 온 다른 러너들과 함께 함성을 질렀다. 당시에는 지하도 끝에 찬란한 빛과 함께 응원 함성이 울려 퍼졌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보스턴 마라톤에는 20마일과 21마일 사이(32~34km) 유명한 ‘하트 브레이크 힐’(heart break hill)이 있다. 마라토너들이 앞선 거리를 달려오느라 에너지원이 고갈되어 힘든 구간이기도 하다. 언덕을 올라야 하기에 숨차고 고된 구간이라 하여 하트 브레이크 힐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봉주 선수가 이 구간을 통과할 때 소리를 지르며 힘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봉주 선수는 2001년 4월 16일 제105회 미국 보스턴 마라톤을 2시간 9분 43초 기록으로 제패하였다.
마음먹은 것을 소리 내어 말하면
힘들지만 하기로 마음먹은 일이 있다면 소리 내어 말해보자. “운동할 거야” “금주할 거야” “담배를 끊겠어” “애들 앞에서는 화내지 않을 거야” “이제부터는 게임을 하루에 20분만 할 거야” “하리라!” 말이 귀를 통해 마음에 울릴 때, 내 마음의 반응을 보자. 사실이 아닌데, 그렇지 않은데 말을 내뱉으려면 쑥스럽고 불편하고 어색한 느낌이 있다.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다면,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왜 소리 내어 말하려고 하니까 안되지? 무엇 때문에 말이 나오지 않지? 왜 불편한 느낌이 들지?”
반문과 의문, 어색함은 어떤 것 때문일까? 할 마음이 없으면 말을 내뱉을 수 없다. 그렇게 할 자신이 없으니까 말을 할 수 없다. 소리 내어 말하려니 스스로 속이는 느낌이 든다. 마음에 껄끄럽고 불편해서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다. 힘들기 싫은 것은 보통 사람의 마음이다. 그런데 힘들이지 않고 얻어지는 것은 없다.
“선생님, 지난번 진료에서 ‘자신을 속이려 하는 건 아닌지, 정말 그런지 늘 확인하고 반문해야 한다’는 말이 들을 때는 마음이 어려웠어요. 그런데 지나고 나서 큰 도움이 되었어요. 저는 그동안 술을 마실 이유를 찾아서 마셨더라구요. 술 마시고 싶은데 참으려면 힘드니까 핑계를 대었어요. ‘오늘은 일이 힘들었으니까 마셔도 되지 않을까? 이런 위로도 없다면, 나는 무슨 낙으로 살지?’ ‘친구들끼리 모였으니까 한 잔 해야지’ ‘날이 더우니까 한 잔 마셔야지’ 술 마시는 것을 절제하려면 제 마음을 지켜봐야 하더라구요. 그래서 어떤 이유를 대면 ‘정말 그럴까?’ ‘나 지금 핑계를 대고 있구나. 나에게 속지 말자!’ 마음을 먹을 수 있었어요. 술을 마시면 기분도 좋고 또 술 자체가 맛있기도 하고 그런데 그 좋은 걸 안 마시고 참으려니까 힘들었어요. ‘힘들어도 참자. 핑계 대지 말자’ 그렇게 마음먹고 ‘마시지 말자’ 배에 힘주어 소리 내서 다짐하니까, 참을 수 있었어요. 술을 마시지 않으니까 체중도 줄고 기분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도 이전보다 나아요. 잠도 잘 자구요.”
소리가 마음에 자극을 주고 뇌에 인식
마음먹은 것이 있다면 또박또박 소리를 내어 스스로 말해보자. “하자, 해보자, 하리라” 스스로에게 한 말이 소리 에너지로 자신의 마음을 울린다. 소리를 내어 말할 때 마음의 느낌을 살펴보면, 힘든 것을 마주하고 이겨낼 마음이 있는지 아닌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소리를 내어 말할 때 내가 한 말이 귀를 통해 마음을 울리는데,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지 살펴보자. 소리는 파동, 즉 진동 에너지이며 긍정하는 소리가 마음에 힘을 주고 소리 자극이 뇌에 신호로 입력된다. 거울로 자신을 보면서 말하면 더 효과가 발휘된다. 아침, 저녁 세수할 때 소리 내어 말해보자. “해보자” “하리라” “나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다.”
# 마라톤 하는 정신과 의사 김세희의 ‘마인드 업’은?
세계 6대 메이저 베를린·보스턴·도쿄·시카고·런던 마라톤을 포함해 50여 차례 국내외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한 김세희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임상교수가 연재하는 ‘마라톤 하는 정신과 의사 김세희의 마인드 업’ 전문은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코너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김 교수가 20년간 달리기와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통해 깨달은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의 회복’을 원하는 독자분들께 큰 도움이 될 것 입니다.(※네이버, 다음 등 포털뉴스 페이지에서는 하이퍼링크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주소창에 아래 링크를 복사해 붙여넣어 읽을 수 있습니다.)
‘마인드 업’ 연재모음 QR코드 |
1화 전문 읽기
‘그만두고 싶은 마음’ 일으켜 세우는, 달리기의 힘
▶https://www.hani.co.kr/arti/society/health/1199311.html?h=s
2화 전문 읽기
아무도 나에게 ‘그것밖에 못 하냐’ 하지 않는데
▶https://www.hani.co.kr/arti/society/health/1201693.html?h=s
3화 전문 읽기
단번에 되는 건 없다…축적도 회복도 ‘시간’이 필요하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health/1204120.html?h=s
3화 전문 읽기
“달리기가 정신 건강에 좋아요?”
▶https://www.hani.co.kr/arti/society/health/1206580.html?=s
※이 글의 상담 사례로 등장하는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실제 상담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김세희 |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임상교수·‘마음의 힘이 필요할 때 나는 달린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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