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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청년의 꿈’ 조선소의 퇴락…그러나 다른 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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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청년의 꿈’ 조선소의 퇴락…그러나 다른 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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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재영

일러스트레이션 김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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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당시 대우조선해양이었던 현 한화오션 옥포 조선소에서 극한 농성이 벌어졌다. 유최안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은 배 안에 0.3평 규모 구조물을 용접한 뒤 스스로 갇혀 농성했다.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하청 노조의 파업을 알리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노조가 공개한 사진 속엔 손으로 직접 쓴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란 표어가 걸려 있었다. 유최안 부지회장은 ‘에이(A)급 용접사’였다. 선박 건조 용접의 실력 척도는 명확. ‘용접 구간을 불량 없이 균일한 폭으로 이어 붙일수록’ 뛰어난 용접사다. 22년간 용접기를 만진 유최안 부지회장은 조선소에서 탑재 용접을 했다. 거대한 선박 안과 밖, 현장 노동 중 최고 수준으로 위험하고 가혹한 환경에서, 숙련 용접사인 유최안 부지회장은 당시 200만원 남짓한 월급을 받으며 일했다.



노동조합에서 공개한 임금 명세를 본 그날은 종일 혼란스러웠다. 그로부터 십몇년 전 내가 알던 조선소는 고작 몇푼 받고 일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통합창원시 마산합포구의 경남대학교 정문 옆에는 구불구불한 언덕길이 있었다. 밤밭고개라고 불리는 이 언덕길 초입엔 ‘해양산업인력사업소’란 간판의 인력 사무소가 있었다. 이 사무소엔 종종 방학을 맞이한 경남대 재학생이나 휴학생들이 찾아오곤 했다. 등록금을 메꾸기 위해 조선소 ‘알바’를 생각하는 학생들이었다.



상대적 고임금 아르바이트라고 하면 지금은 대부분 쿠팡을 떠올리지만, 당시 동남권 대학생 남성들의 등록금 벌이는 공장 아르바이트였다. ‘주주야야휴휴’의 3교대 혹은 주야간 교대 공장 노동의 월급이 200만원 약간 아래였다. 임금을 두달 받으면 얼추 한 학기 등록금 정도는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생활비까지 벌어야 하는 흙수저들에겐 충분한 금액이 아니었다. ‘독한’ 남학생들은 방학철이 되면 거제로 향했다. 상상 이상의 살벌한 노동 강도에 금방 뛰쳐나온 학생들도 많았다. 반면 두달 만에 등록금과 반년치 월세까지 벌어온 학생도 있다.



이들이 학교로 돌아와서 푼 조선소 ‘썰’은 무용담이 되어 동기들과 선후배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특히 어깨너머 전해 들은 에이급 용접사들의 임금은 솔깃했다. 일당이 30만~40만원. 그마저 네시간만 일하고 귀가한다는 소문에 몇몇은 “졸업장 딸 바에야 지금부터 조선소 가서 용접할까?” 하고 반응했다. 대부분 우스갯소리였다. 조선소 용접사로 거듭나는 과정은 지난함 그 자체. 일단 사내 용접 라이선스를 취득해야 한다. 안전모에 라이선스 스티커가 붙는 순간부터 비로소 용접할 자격을 얻는다. 자격 증명이 되었다고 한들 곧바로 실전 투입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용접은 실수했을 때 되돌리는 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용접을 잘못하면 불량 부위를 몽땅 절삭기로 갈아내거나 고열로 파내든 해서 새로 붙여야 한다. 품질 검사 또한 새로 해야 하므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자격증을 따도 용접기를 쉽게 쥘 수 없다. 기량을 증명할 수 있을 때까지 하염없는 ‘시다’ 생활을 거쳐야만 했다.



그토록 불합리한 구조를 알면서도 사람들이 남쪽 끝 조선소로 향한 이유는 확실했다. 앞이 깜깜하고 육체는 고달픈 시기만 넘기면 비로소 낙이 옴을, 빈털터리에서 중산층까지 도달할 수 있음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만 있으면 굶어 죽지 않는다던 오랜 믿음은 이제 옛이야기가 됐다.



왜인가. 이유를 대라면 댈 순 있다. 리먼 브러더스 사태의 촉발. 물동량이 줄고 운임료는 하락. 반면 선박은 공급과잉으로 발주량 폭락. 조선사도 이를 예견해 해양 플랜트 사업을 시도했으나 실패. 그 와중에 대우조선 분식회계 적발. 조선소 대불황 발생. 노동자들의 임금 대폭 삭감. 이후 환경 규제 영향으로 엘엔지 선박 발주량이 치솟았지만 임금은 요지부동인 상황까지. 정보는 머릿속에 한가득 집어넣었다. 그럼 무엇 하나. 결국 ‘이 돈을 받고 조선소에서 왜 일하나?’와 ‘이 돈 주는데 조선소는 어떻게 돌아가나?’란 근본적인 질문엔 답하지 못했다. 그 답은 오직 현장에 있을 것이었다.



하여 조선소에서 일하게 됐다. 물론 고작 글감 좀 줍자고 거제까지 남행을 결의한 건 아니었다. 그보단 2년 반의 서울 생활을 끝내고 지방으로 내려와 백수 생활이 길어져가던 내 사정 탓이었다. 작가 일을 하지만 글만 써서 먹고살 순 없는 노릇이요, 중소기업에서 일과 글을 병행하기엔 내 체력이 부족했다. 대기업 입사 아니고선 도무지 내 삶을 안정시킬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분명 유유자적하게 살려고 수도권을 떠났건만, 오히려 살기가 더 힘들었다. 지방의 중소기업이 워낙 열악한 탓이었다. 대졸자가 아닌 남성 청년의 일터는 특히 심각했다. 가장 많고 흔한 장소가 공장인데, 지방 중소 공단의 공장 태반이 대기업의 부품 생산소였다. 대기업이 시키는 일만 수행하므로 회사가 이윤을 많이 남겨 먹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사장님들도 큰돈 벌 생각이 없었다. 관심 분야 또한 사업이며 경영이 아니었다. 그저 회사가 모바일 게임 자동 사냥처럼 흘러가길 바랄 뿐. 당연히 연구 개발보단 잔업 특근으로 노동자를 쥐어짜는 일에만 골몰한다. 이런 지뢰 회사로 가득한 지방에서 그나마 채용 공고가 자주 뜨는 대기업이 한화오션이었다.



지난해 9월, 마침내 한화오션 생산직 채용 공고가 떴다. 간절한 마음으로 자소서(자기소개서)를 써서 날렸다. 놀랍게도 서류가 통과됐다. 생전 몸에 안 끼워본 양복을 입고 새벽 첫차로 거제 옥포까지 갔다. 면접 장소에 도착하니 면접자 태반이 의자에 앉아 굳은 표정으로 허벅지를 손으로 쓸고 있었다. 엄연한 경쟁자임에도 적개심보단 동질감이 드는 풍경이었다. 삶을 뒤바꿀 수 있는 기회를 앞두고 긴장 안 하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 곧 장소를 바꿔 4인 1조로 진행하는 면접이 시작됐다. 첫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바로 불합격을 예감했다. 나머지 면접자 셋의 이력이 화려했다. 용접 기능장, 조선소 하청 10년 근무, 기능경기대회 수상자, 그리고 2021년 이후 현장직 경력이 아예 없는 나. 대답은 막힘없이 잘했지만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한달 가까이 지나 불합격 통보가 왔다. 없던 오기가 생겼다. 하청 회사라도 입사해서 경력직으로 들어가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한편 호기심도 돋아났다. 극한 파업 이후 2년이 지난 요즘 조선소는 과연 어떨까?



천현우 | 창원시에서 여러 회사 전전하며 10년간 제조업 노동자로 일했다. 서울 성수동 미디어플랫폼 얼룩소(alookso) 등에서 2년 반 일하다 다시 경남으로 돌아왔다. 현재 거제 조선소에서 일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청년정책조정위원회 민간위원을 했다. 산문집 ‘쇳밥일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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