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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재 | 도쿄 특파원
“1945년 9월21일 밤, 나는 죽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던 해, 세이타는 일본 어느 기차역 기둥에 기댄 채 숨졌다. 한달여 전 일왕의 항복 선언으로 전쟁이 끝났지만, 14살 어린 소년에겐 버틸 힘이 더는 없었다. 그해 3월부터 미군은 전략폭격기 B-29를 동원해 일본 본토에서 본격적인 대공습 작전을 실행했다. 일본군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다는 명분으로 불타는 소이탄을 가장 약한 고리인 민간인 거주지에 퍼부었다.
4살짜리 여동생 세쓰코를 업고 먼저 몸을 피했던 세이타는 온몸이 불탄 채 붕대로 싸인 엄마를 마주했다. 밖에선 영문을 모르는 동생이 서성거렸다. 세이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빠는 군대에 동원됐고, 기댈 사람이 없던 남매는 인적 끊긴 산속 방공호로 거처를 옮겼다. 남매가 잠들자 반딧불이가 찾아와 불을 밝혔다. 이튿날 죽은 반딧불이들을 위해 구덩이를 파던 세쓰코는 오빠에게 말한다. “엄마도 무덤에 계시겠지? 고모한테 들었어.” 고개를 숙이고 슬픔을 감추는 오빠에게 세쓰코는 울며 묻는다. “왜 반딧불이는 그렇게 빨리 죽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양실조에 걸린 세쓰코마저 숨졌다. 마치 너무 짧게 빛을 내고 죽는 반딧불이처럼. 세이타는 동생이 그렇게 좋아하던 사탕 상자를 품에 넣어주고 자신의 손으로 화장한다.
고 다카하타 이사오(1935∼2018) 감독의 애니메이션 ‘반딧불이의 묘’는 태평양 전쟁 도중 죄 없이 죽어간 아이들을 다룬 명작으로 꼽힌다. 다카하타 감독은 ‘이웃집 토토로’ 등으로 유명한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제작사 지브리스튜디오를 세운 공동 창립자이도 하다. 동명 원작 소설을 쓴 고 노사카 아키유키 작가는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전쟁 반대에 강한 목소리를 냈던 인물이다.
패전 80년을 맞은 올해 일본에선 오티티(OTT) 넷플릭스가 지난 15일 이 영화를 다시 공개했다. 스트리밍 첫주 글로벌 7위(영화·비영어 부문), 일본에서 3위에 올랐다. 원작 판권을 가진 신초샤 쪽은 “80년이 지났지만 전쟁의 불길이 꺼지지 않은 시대, 이 영화가 국적·인종·민족을 불문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고 있다”고 평가했다.
십수년 전 영화를 처음 봤을 때처럼 이번에도 마음이 너무 아파 한 장면, 한 장면을 온전히 보기 어려웠다. 한편으로 영화는 최근 일본 정치권에서 군국주의 향수를 자극하는 분위기를 떠올리게 했다. 일본에선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총리가 식민 지배에 사죄 뜻을 밝힌 뒤 10년 간격으로 발표해온 ‘총리 담화’에 저항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20일 참의원 선거에서는 극우 성향 신생 참정당이 전쟁 포기 조항을 수정하는 개헌, 일왕 중심 입헌 군주제 같은 시대착오적 구호로 돌풍을 일으켰다. 배외주의를 앞세운 참정당 지지율이 높아지자, 다른 보수 정당뿐 아니라 정부까지 나서 외국인 규제 강화 조직을 만들었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자민당의 참의원 선거 참패 원인으로 외국인에 대한 부실 대응을 꼽기도 했다. 지난 16일 일본 비정부기구(NGO) 265개 단체의 공동성명을 귀담아들을 만하다.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 특히 배외주의 선동은 외국계와 외국인들을 고통에 빠트립니다. 다른 국적, 민족과 대립을 조장해 공생 사회를 파괴할 뿐 아니라 전쟁 전조가 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행위입니다.”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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