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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법재판소 “탄소 안 줄이면 국제법 위반”···책임 큰 한국, 감축 부담도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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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법재판소 “탄소 안 줄이면 국제법 위반”···책임 큰 한국, 감축 부담도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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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 안 취하면 ‘국제적 불법 행위’ 해당” 권고 채택
파리협정 탈퇴한 미국에도 기후변화 대응 의무 부과
NDC 제출 앞두고 인권위 “최고 수준 의지 반영을”
유지 이와사와 국제사법재판소(ICJ) 소장과 재판관들이 지난 23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기후변화 대응에 대한 국가의 법적 의무에 관한 권고적 의견을 발표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유지 이와사와 국제사법재판소(ICJ) 소장과 재판관들이 지난 23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기후변화 대응에 대한 국가의 법적 의무에 관한 권고적 의견을 발표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유엔의 최고 사법기관인 국제사법재판소(ICJ)가 기후변화 협약이 각국에 부과한 엄격한 의무를 지키지 않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기후위기로 피해를 입은 국가가 선진국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의견도 냈다. 이번 결정은 한국 정부의 2035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설정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법재판소 “기후위기 피해 입은 국가,
불법 행위 국가에 책임 물을 수 있다”


재판소는 23일 오후(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파리협정 등 기후변화조약에 서명한 당사국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고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의무를 가진다”며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국제적 불법 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는 내용의 권고적 의견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ICJ가 기후위기에 관한 판단을 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재판소의 권고적 의견은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국제법 해석이나 국제 분쟁 해결에 있어서 권위 있는 해석으로 인정받는다.

재판소는 기후변화 피해를 입은 국가는 기후 피해를 일으킨 국제적 불법 행위를 저지른 국가에 개별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봤다. 불법 행위를 저지른 국가는 행위를 중단하고, 재발 방지를 보장하며, 상황에 따라 피해 국가에 배상을 해야할 수 있다. 재판소는 국제적 불법 행위의 예시로 화석연료를 생산하고 소비하거나, 화석연료 탐사를 허가하고 화석연료에 보조금을 제공하는 행위를 들었다.

재판소는 교토의정서, 파리협정 등 기후 관련 협약과 몬트리올의정서, 생물다양성 협약 등에 서명한 당사국은 물론 국제관습법과 국제인권법에 따라 전 세계가 이런 의무와 책임을 진다고 했다. ‘깨끗하고 건강하며 지속가능한 환경’은 인권의 전제 조건이라는 점에서다. 이 판단에 따르면 파리협정에서 탈퇴한 미국도 기후변화 대응 의무를 진다.

기후변화에 관한 ‘국제적 불법 행위’가 여러 국가에 의해 오랜 기간 발생했으며 피해 역시 많은 국가에서 발생해 국가의 개별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의견이 나오지만 재판소는 “역사적 배출량과 현재 배출량을 고려해 각 국가가 전 지구적 배출에 기여한 총량을 산정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국제적 불법 행위와 피해 간의 인과관계가 개별 사안별로 구체적인 평가가 필요할 뿐, 기후변화 피해에 관한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다만 인과관계를 증명하기 어려운 기후위기의 특수성을 고려해 가해 국가의 불법 행위와 피해 국가의 손해 간에 ‘직접적이고 확실한 인과적 연결’을 유연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바누아투의 기후변화장관 랄프 레겐바누(왼쪽에서 세 번째)가 지난 23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국제사법재판소의 권고적 의견이 나온 뒤 기자들에게 “이번 판단은 기후변화 대응에 있어 획기적인 이정표”라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AFP연합뉴스

바누아투의 기후변화장관 랄프 레겐바누(왼쪽에서 세 번째)가 지난 23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국제사법재판소의 권고적 의견이 나온 뒤 기자들에게 “이번 판단은 기후변화 대응에 있어 획기적인 이정표”라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AFP연합뉴스


한국 “‘책임’ 많고 감축 ‘역량’도 높아”
각국 화석연료 정책 점검 불가피해져
‘대왕고래 프로젝트’ 불법 행위될 수도


전문가들은 이번 판단이 각 국가의 2035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내용과 각국의 화석연료 관련 정책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재판소가 누적배출량이 많고 발전 수준이 높은 국가는 국제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책임과 역량에 따라’ 더욱 많은 몫을 기여해야 한다고 명시하면서 그간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한 선진국들은 더 큰 책임을 지게 됐다.

오는 9월 2035 NDC를 제출하기로 한 한국 역시 목표 설정에 부담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중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 5위이며 1990년 이후 누적 배출량이 전 세계 15위에 달하는 국가다. 국내 기후환경단체 플랜1.5의 최창민 정책활동가는 “한국은 지금껏 배출한 온실가스양이 많아 ‘책임’이 많고, 경제 수준이 높아 배출 감축 ‘역량’도 높은 나라”라며 “2035년까지 2019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을 60% 감축하는 것이 최소 국제기준이지만, 선진국인 한국은 이보다 더 높은 기준을 적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한국 정부는 재판소의 권고를 고려해 2035 NDC 설정 시 가능한 가장 높은 수준의 의지를 반영할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재판소가 화석연료 관련 정책을 대표적인 ‘국제적 불법 행위’로 판단하면서 각 국가의 화석연료 관련 정책 점검이 불가피해졌다. 국가가 동해 심해 가스전 탐사 개발 사업 ‘대왕고래 프로젝트’, 석탄·액화천연가스(LNG) 발전, 화석연료 지원 등으로 환경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국제적 불법 행위로 간주될 수 있어서다. 최 활동가는 “대부분의 선진국 목표(2030년대)보다 뒤처진 이재명 정부의 석탄 퇴출 목표시점(2040년)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11월 브라질에서 열릴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0)에서도 기후변화 피해를 입은 개발도상국의 발언이 힘을 얻게 됐다. 지난해까지 전 세계적으로 약 3000여건이 제기된 것으로 알려진 기후 관련 소송은 더 활발해질 전망이다.

2015년 3월16일 태풍이 강타한 태평양 섬나라 바누아투 수도 포트빌라에서 한 소년이 아버지가 폐허가 된 집을 수색하는 동안 공을 가지고 놀고 있다. AFP연합뉴스

2015년 3월16일 태풍이 강타한 태평양 섬나라 바누아투 수도 포트빌라에서 한 소년이 아버지가 폐허가 된 집을 수색하는 동안 공을 가지고 놀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23일(현지시간) 기후활동가들과 시민들이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가 기후변화에 관한 국가들의 의무에 대해 권고적 의견을 낭독하기 전 국제사법재판소 밖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3일(현지시간) 기후활동가들과 시민들이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가 기후변화에 관한 국가들의 의무에 대해 권고적 의견을 낭독하기 전 국제사법재판소 밖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번 판단은 태평양 섬나라 바누아투의 청소년들이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단을 구하자는 의견을 제시하고, 유엔이 2023년 3월 재판소에 권고적 의견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결과 나올 수 있었다. 유엔은 국제법에 따라 국가가 온실가스 배출에 관해 다른 국가 및 현재·미래 세대를 위해 부담하는 의무가 무엇인지, 국가가 기후와 환경에 중대한 피해를 초래했을 때 발생하는 법적 결과는 무엇인지 재판소에 물었다.

모든 당사국에 감축 의무가 있으며, 이 의무를 위반하면 모든 법적 책임을 져야한다는 재판소 판단이 나오자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것은 지구를 위한 승리, 기후 정의를 위한 승리,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젊은이들의 힘을 위한 승리”라는 영상 메시지를 발표했다.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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