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최희정 기자 = 한반도 땅에 800년 존재했지만 백제에 흡수되면서 잊혀진 나라, 마한.
그러나 마한은 우리 민족 정체성의 뿌리이자 '한(韓)'이라는 문화 원형이 시작된 곳임을 저자는 강조한다. 대한민국, 한민족이란 단어에 쓰는 '한(韓)'이 역사상 처음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기원전부터 6세기까지 한반도 중서부에 존재했던 마한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 떠나는 여행기다. 전작 '잊혀진 나라 가야 여행기'로 세종도서에 선정된 정은영 작가가 이번엔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남도 땅 곳곳을 발로 누비며 마한을 찾아 나선다.
단순한 고고학적 설명이나 역사 기록의 나열이 아닌, 개인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감성적인 여정이 담겨 있다. 광주, 나주, 무안, 해남, 신안 등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여행길은 과거와 현재, 기록과 상상, 역사와 일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마한의 옹관묘, 금동관, 금동신발부터 시작해 마한인의 부엌과 식생활, 예술과 음악, 동물과의 교감까지 다채로운 소재들이 글 속에 살아 숨 쉰다.
이 책은 '잊힌 것을 환대하고 기록하는' 작가의 오랜 여정에서 비롯됐다. 백제의 그림자에 가려진 마한의 존재를 근간으로 '나는 누구이며 나란 존재는 이 땅에서 어떻게 비롯되었는가'를 되묻는 내재적 사유의 여행이다.
마한은 진한, 변한과 함께 삼한을 구성했던 고대 연맹왕국으로, 54개 소국이 연합한 형태였다. 진한(신라), 변한(가야)과는 달리 백제에 흡수되며 역사의 기록에서 밀려났지만 실제로는 기원전 3세기부터 6세기까지 약 800년간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영암은 스스로를 ‘마한의 심장’이라 자부하는 역사의식을 지닌 고장이다. 이곳을 여행하다 보면 '마한의 심장, 영암'이라는 문구를 곳곳에서 마주하게 된다. 짧은 어구지만 그 안에는 긴 시간의 대서사를 마주한 이들의 비장한 마음가짐이 응축되어 있다. 마한의 심장이라는 강렬한 메시지는 영암의 정체성을 견고히 세우고, 세상에 자신을 알리는 외침이 되며, 무엇보다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힘이 된다." (본문 88쪽)
"공동체 중심의 삶과 연대감을 지닌 마한인들은 역설적이지만 독립성과 자율성을 중시했다. 이는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라 소국들 간의 느슨한 연맹체였기 때문이다. (중략) 마한인들을 두고 '사납고 용맹하다'는 표현이 나온다. 영산강 유역의 마한 사람들은 백제가 성장하며 마한을 병합하는 과정에서도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싸우고 버티며 문화적 정체성을 고수했다. 그 근간이 되는 것이 사납고 용맹함이다. 이것은 단순한 폭력이나 반항과는 다르다. 억압과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본능적이고 원천적인 힘이다. (본문 166~167쪽)
이 책은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1부는 마한의 땅을 직접 걷는 여정이다. 익산·고창, 담양, 광주, 나주, 영암, 함평, 무안·목포, 해남, 신안에 이르기까지 마한의 주요 유적지와 풍경을 따라가는 여정이 감성적으로 펼쳐진다. 영산강을 따라 이어지는 여행은 마치 한 편의 순례처럼 시간의 켜를 따라 독자를 마한의 세계로 인도한다.
2부는 마한을 상상하는 시간이다. 마한의 문화와 인물, 유물들이 조명된다. 마한의 옹관묘와 아파트형 고분, 신창동 현악기, 금동관, 금동신발, 구슬과 문신, 동물과의 교감 등 다양한 테마가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으로 만들어진다. 특히 마한의 여성 리더의 존재, 왕인 박사의 정체성, 일본 요시노가리 역사공원과의 비교 등은 고대사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저자는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이자 고고학을 전공한 '역사 여행가'로, 2021년부터 2024년까지 3년간 마한의 흔적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때로는 홀로, 때로는 전문가들과 함께 계절마다 다른 모습의 유적지를 방문하며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를 발견해왔다.
책은 익산과 고창의 마한 유적지를 시작으로, 영산강 발원지인 담양을 거쳐 광주 신창동의 생활유적, 나주의 반남 고분군과 복암리 아파트형 고분, 영암의 내동리 쌍무덤, 함평의 장고분, 무안과 목포의 영산강 하구, 해남의 군곡리 유적, 신안의 바닷가 무덤까지 마한의 흔적을 따라간다. 특히 국립나주박물관의 거대한 옹관들과 국보 금동관, 정촌 고분의 금동신발 등 마한의 독특한 문화유산은 생생한 사진자료들과 어울려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54개 소국의 연맹체였던 마한은 중앙집권이 아닌 자율적 공동체 문화를 유지했다. 혈연 중심의 다장(多葬) 풍습, 400년간 지속된 아파트형 고분, 어머니의 자궁을 닮은 거대한 옹관 등은 포용과 공동체를 중시한 마한인의 정신을 보여준다. 또한 현악기 등 다양한 악기와 5·10월 제천행사는 현재 K-컬처로 각광받는 축제 문화의 원형이며, 금보다 구슬을 선호하고 문신을 했던 독특한 미의식 또한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중국 문헌에 기록된 마한인들의 '사납고 용맹함'이, 불의에 맞서는 저항정신으로 이어져 동학농민운동과 광주민주화운동 등 역사적 전환점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유년기를 보낸 함평에서는 마한 유적을 만나며, 오래된 것들이 지닌 아름다움과 장소에 대한 깊은 애정(토포필리아)을 확인한다.
☞공감언론 뉴시스 dazzling@newsis.com
▶ 네이버에서 뉴시스 구독하기
▶ K-Artprice, 유명 미술작품 가격 공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