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최희정 기자 = 황규관의 시집 '뒤로 걷는 길'이 창비시선에서 출간됐다.
고단한 삶의 무게를 견디며 써내려간 황규관의 시는 절망의 밑바닥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시인은 폐허가 된 세계에서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담한 고통과 침묵을 외면하지 않는다. 가난과 허무 속에서 천천히 그림자들에게 연대의 언어를 건넨다.
"비루한 비굴을 이고 사는"('동백 씨') 존재, "주머니에는 먼지만 가득"하고 "가진 거라고는 가만히 내다보는/ 저물녘뿐"('밭 한뙈기')인 삶은 그의 시의 출발점이다.
"건널 수 없는 벌건 물길"('마지막 강') 앞에 먼저 가서 선 시인은 '지난 시간'을 되짚으며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 걸까"('흐르지 않는 강') 자문한다. "가난과 기도와 투쟁과 함께" 살아온 시간을 지나, "딱 오늘 하루만 살자"('오늘 하루만')는 절박하고도 단단한 다짐을 시에 새긴다.
그의 시선은 성장과 진보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자본의 폭력, 인간의 존엄이 무참히 짓밟히는 현실을 꿰뚫는다. 잊을 만하면 일터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세상에서 "이제 더는/앞으로 갈 수 없을 것 같다"('뒤로 걷는 길')고 고백하면서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는다.
"벌겋게 타는 숲이나/ 흙탕물에 휩쓸린 도시를 보면/ 자꾸 발길이 뒤로 향한다/ 구토가 나오도록 번식하는 길을 따라/ 분열을 멈추지 않는 언어와/ 깊이 없는 높이 사이를 지나/ 다다른 곳에 서서, 이제 더는/ 앞으로 갈 수 없을 것 같다/ 차라리 뒤로 걸어 가난한/ 배롱나무 그림자에게로 가야지/ 강물에 뜨거워진 머리를 감아야지/ 쓰러진 함성과 노래를 누더기 삼아/ 담장 너머로 오가던 주먹밥과/ 밭일 끝낸 저녁 불빛이 돼야지/ 떨어져 죽고/ 불에 타 죽고/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게 죽는 세계로/ 산자락을 베고 무너뜨리며/ 더는 갈 수 없을 것 같다/ 이제는 앞을 보며 뒤로 걸어야지/ 어둠이 되어/ 어둠을 사랑해야지/ 뒤가 앞이 되게 해야지/ 뒤도 앞도 사라지게 해야지" (16~17쪽, '뒤로 걷는 길')
차오르는 슬픔을 외면하기보다 "새까만 슬픔을 노란 꽃잎으로/바꾸는 연금술"('불타는 밀밭')을 믿으며 한발 한발 앞으로 내딛는다.
절망 속에서도 시인은 "숨어 있는 길을 찾으라는/아픈 채찍"('무서운 말씀')을 기꺼이 감내한다. 그리고 "매번 실패하는 사랑도/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때가 차면')은 믿음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향해 앞장서 나아간다.
이번 시집에서는 특히 '동학(東學)' 연작시 다섯편을 주목할 만하다. "이 지독한 곳"('저녁노을 2')을 넘어서기 위해 분투해온 시인은 마침내 '동학'에 다다랐다.
이 연작시는 "혁명에는 언어가 필요하지/ 과거를 만난 미래의 언어/ 죽지 않고 미래의 문을 두드리는 과거의 언어"('장시')라는 시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역사를 대어보는"('매미가 운다') '혁명의 언어'로 읽힌다.
시인은 "모시고/ 살리고/ 가꾸고/ 절하고/ 꿈꾸"('포고문')는 '동학'의 정신을 단순히 과거의 혁명 신화로 다루지 않는다. 그 대신 오늘의 삶과 연결해 "지금도 무너지는 사람과 베어지는 나무와/ 심지어 파헤쳐지는 무덤"('무서운 말씀')이 생겨나는 현실을 냉철히 돌아보게 하는 재료로 삼는다.
동학이 단지 과거의 역사적 운동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에도 섬겨야 할 삶의 태도임을 일깨우며 "비참의 흉부"('도시락 건네주러 가는 길')가 점점 어두워져가는 현실의 고통과 절망을 견딘 자만이 도달하는 새로운 희망의 시를 노래한다.
황규관 시인은 1993년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으로는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정오가 온다',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호랑나비' 등이 있다. 백석문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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