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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과학자들이 ‘인간과 백로 공존방안’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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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과학자들이 ‘인간과 백로 공존방안’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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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과학자들이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중방마을 주위에서 집단서식지를 형성하고 있는 백로류 조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이승현 무위당학교 숲학교장 제공

시민과학자들이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중방마을 주위에서 집단서식지를 형성하고 있는 백로류 조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이승현 무위당학교 숲학교장 제공


“우리의 무관심과 이기심 탓에 자취를 감췄던 백로류가 다시 원주를 찾아왔습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무위당학교 숲학교장을 맡고 있는 이승현(52)씨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무위당학교에서 숲학교장을 맡고 있을 정도로 평소 자연생태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이씨가 백로류에 빠지게 된 것은 2023년부터다. 백로류는 왜가리와 중대백로, 중백로, 쇠백로, 황로, 해오라기 등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그해 5월 이씨는 강원 원주시 호저면 중방마을 일대를 지나가다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이 일대에서 자취를 감춘 줄 알았던 백로 수십여마리가 나무 위에 빼곡하게 둥지를 틀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원래 중방마을은 마을 입구에 커다란 ‘학마을’이라는 표지석이 있는 등 예부터 백로류가 많이 찾아오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1994년 이 일대는 백로류 집단서식지인 ‘야생동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2004년 환경부 조사 결과를 보면, 왜가리 302마리와 중대백로 298마리, 쇠백로 24마리 등 백로류 672마리가 관찰될 정도였다.



하지만 시끄럽고 배설물 때문에 냄새가 난다는 민원이 제기되자 2016년 산 소유주가 보호구역을 뺀 주위의 나무를 전부 잘라낸 이후 백로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결국 2020년 5월 야생동물보호구역까지 해제되면서 이 일대는 ‘학 없는 학마을’이 됐다.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중방마을 주위에 집단서식지를 형성하고 있는 백로류 모습. 이승현 무위당학교 숲학교장 제공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중방마을 주위에 집단서식지를 형성하고 있는 백로류 모습. 이승현 무위당학교 숲학교장 제공


마을 주위에 백로 집단서식지가 다시 형성되고 있는 것을 확인한 이씨는 이들의 생태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부터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시간이 날때마다 중방마을을 찾았지만 혼자 힘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백로류 조사 연구에 필요한 전문성 부족도 문제였다.



그러다 지난해 2월 조류 전문가인 기경석 상지대 산림조경학과 교수와 인연이 닿으면서 이씨의 계획은 급물살을 탔다. 지난 3월 무위당학교 숲학교 이름으로 전문가·시민과 함께 백로 집단서식지와 먹이활동터 조사를 하겠다는 사업계획서를 생태전환지원재단에 제출했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공모 사업에 선정되면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기경석 상지대 조경산림학과 교수는 “백로류는 한국 민물 생태계에서 수달 등과 함께 대표적인 최상위 포식자다. 먹이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특정 종이 지나치게 번성하는 것을 억제해 종별 개체 수 균형을 맞추는 등 다양한 종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생태계 그물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주 중방마을 서식지 훼손으로
사라진 백로가 돌아오는 걸 보고
시민들과 함께 백로류 조사·연구
주부에서 정년퇴직자 등 14명 참여
현장 조사로 200여마리 서식 확인





연구 결과 학술지에 투고하고
세미나 열어 시민들과 공유 계획





시민과학자들이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중방마을 주위에서 집단서식지를 형성하고 있는 백로류 조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이승현 무위당학교 숲학교장 제공

시민과학자들이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중방마을 주위에서 집단서식지를 형성하고 있는 백로류 조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이승현 무위당학교 숲학교장 제공


이씨는 먼저 기경석 교수의 도움을 받아 백로 집단서식지 현황과 먹이활동 등을 조사할 시민과학자 모집에 나섰다. 시민과학자란 1989년 미국에서 시민 지원자 225명이 산성비의 산성 정도를 수집해 오듀본협회(미국 야생동물 생태계보호회)에 보고하면서 처음 사용된 개념이다. 전문 과학자는 아니지만 해당 분야에 관심 있는 시민이나 학생 등이 자원해 과학 연구의 모든 과정 또는 관찰·측정 등 일부 과정을 함께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이승현 숲학교장이 시민과학자에 주목한 것은 백로 서식지 보호를 위해 시민 참여가 꼭 필요해서다. 특히 전문가 중심의 생태계 조사는 시간적·물리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씨는 “관심 있는 시민이 모여 백로류의 생태적 특성과 현장 조사 방법 등을 사전 학습한 뒤 전문가와 시민들이 역할을 분담해 조사 횟수를 늘리면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도 높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 시민들도 자연 생태계에 대한 학습을 통해 자연의 소중함을 더욱 깊게 인식하게 된다”고 귀띔했다.



이런 식으로 백로류 조사에 참여하게 된 시민과학자는 14명에 이른다. 40대 주부에서부터 60대 정년퇴직자 등 연령뿐 아니라 하고 있는 일도 다양하다. 이들은 지난 4월부터 20차례 이상 현장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까지 조사 결과를 보면, 백로류 200여마리가 이 일대에 집단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백로류 먹이활동을 조사하던 중 멸종위기종 2급인 희목물떼새 서식도 발견했다.



시민과학자들이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중방마을 주위에서 집단서식지를 형성하고 있는 백로류 조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이승현 무위당학교 숲학교장 제공

시민과학자들이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중방마을 주위에서 집단서식지를 형성하고 있는 백로류 조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이승현 무위당학교 숲학교장 제공


시민과학자로 참여하고 있는 박은경(40)씨는 “처음에는 무슨 새인지 구분도 못 하는 등 백로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시작했다. 힘든 일도 많지만 이웃하는 동물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다. 솜털인 상태의 새끼가 태어나고 살아가기 위해 먹이를 찾는 등 생명이 커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감동”이라고 말했다.



시민과학자 김근익(63)씨는 백로류 보호·관리방안 마련을 주문했다. 김씨는 “백로류는 서식지 변화에 민감해 환경변화를 감지하는 지표종이다. 백로가 돌아왔다는 것은 원주천의 생태환경이 그만큼 건강하다는 증거다. 아직 이 집단 서식지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례가 없으며, 적절한 보호 및 관리방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추가적인 서식지 훼손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승현 무위당학교 숲학교장은 “앞으로 백로류 조사 연구 결과를 모아 논문으로 작성한 뒤 환경생태학 관련 학술지 등에 투고하고, 세미나 등도 열어 시민들과도 공유할 계획이다. 인간과 백로의 공존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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