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서울 잠실 소재 소피텔 앰배서더 서울에서 진행한 ‘제24회 한국 로레알-유네스코 여성과학자상’ 시상식에서 학술진흥상 수상 소감과 함께 주요 연구 주제를 강연 중인 임미희 카이스트 화학과 교수. 최지현 기자. |
금속 물질을 주로 다루는 무기화학의 눈으로 알츠하이머병을 연구해 전 세계적으로 새롭고 독특한 과학 분야를 개척 중인 임미희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 자연과학부 화학과 교수가 올해 한국 여성과학계를 대표하는 연구자로 꼽혔다.
임 교수는 지난 16일 로레알코리아와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후원하고 여성생명과학기술포럼이 주관한 `제24회 한국 로레알-유네스코 여성과학자상'의 본상인 `학술진흥상'을 수상했다.
임 교수는 그간 우리나라 화학계에서 드문 리더급 화학자이다. 여성 화학자로서도 그렇지만, 유기화학이나 생화학이 아닌 `무기화학'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몇 없는 인물이다. 화학을 통해 뇌질환을 규명하는 그의 연구 주제 역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그는 현재 카이스트에서 '금속신경단백질화학 연구'라는 새로운 과학 분야를 구축하고 있다.
그의 주요 연구 업적 또한 두드러진다. 알츠하이머 치매의 발병 원인을 설명하는 `아밀로이드 가설' 이론의 중요한 지점을 처음 규명했다. 뇌 활동의 노폐물인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이 `덩어리(플라크)'로 뭉치는 이유가 뇌 속의 불안정한 금속 이온 물질 때문이라는 사실과 이 결과 생성한 물질(이중체 및 삼중체)은 화학적 구조가 변한 탓에 치매를 촉진하는 독성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과학계는 이 연구가 생체 금속-단백질 네트워크(연결망) 속에서 치매의 병리적 특성을 규명하고 다중 위험인자의 연관성을 확인한 점을 높게 평가하고 새로운 개념의 치매 치료제 개발로 이어질 것도 기대하고 있다.
이에 주최 측이 구성한 한국여성과학자상 선정위원회는 임 교수가 과학에 헌신한 30여 년의 시간 동안 새로운 길을 개척한 인물로 높게 평가하고 수상자로 선정했다. 여성으로서 한국 과학기술계의 유리천장과 구조적 성차별을 극복해 나가는 사회적 측면에서뿐 아니라 독특하고 고유한 시각으로 현상과 사물을 규명하는 과학적 측면 모두에서다.
임 교수는 이날 수상 소감에서 "화학자의 입장에서 치매 연구를 하는 일을 특이하게 보는 경우가 많아 이번 상을 받을 수 있을지 전혀 예상치 못했다"며 "함께하고 있는 금속신경단백질화학연구단 분들의 덕분"이라고 감사를 표했다. 이어 그는 "저희 연구단의 모든 연구는 기초과학에서 시작한다"며 "정말 독창적인 기초과학에 기반해 치매를 연구하고 알츠하이머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해 국가 경쟁력에도 기여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지난 16일 ‘제24회 한국 로레알-유네스코 여성과학자상’ 시상식에서 수상자들과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병순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 직무대행, 황은숙 여성생명과학기술포럼 회장, 임미희 카이스트 교수, 강미경 고려대 조교수, 이정현 국립공주대 조교수, 전지혜 경상국립대 조교수, 조유나 부산대 의대 연구교수, 사무엘 뒤 리테일 로레알코리아 대표. 로레알코리아 제공. |
같은 날 신진 유망 여성과학자를 발굴해 시상한 `펠로십' 부문엔 △강미경 고려대 보건환경융합과학부 조교수 △전지혜 경상국립대 생명과학부 조교수 △조유나 부산대 의대 연구교수 △이정현 국립공주대 환경교육과 조교수가 선정됐다.
강미경 교수는 최근 제약·바이오 분야에서 각광받는 신약 플랫폼 기술인 '약물전달시스템(DDS)'을 연구하며 국제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특히 기초과학-중개연구-임상응용을 연결하는 연구를 설계하며 각종 질환 치료에 실용화 가능성이 높은 미래 정밀의료 기술 개발을 이어가고 있다.
전지혜 교수는 노화를 예방하거나 되돌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노화 연구와 조직 재생 기술 등을 적용해 대사기능 이상 간질환(비알코올성 지방간) 및 간경화 치료제를 개발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조유나 교수는 면역학 전문가로 최신 항암치료 기술인 `면역항암제'와 관련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면역세포인 T세포가 암세포와 싸우는 원리와 면역세포들이 서로 소통하며 신호물질(사이토카인)을 분비하는 작동 원리를 밝혀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올해 처음 시작한 이학 분야 펠로십에 선정된 이정현 교수는 우리나라 근해 바다에서 해양생태계와 국민 건강에 해로운 신규 유해화합물 40여 종을 발견하고 해양생태계의 건강성 평가 기법 및 보전 전략을 국제 학계와 협력해 수립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지난 16일 ‘제24회 한국 로레알-유네스코 여성과학자상’ 시상식 중 진행한 패널 토크 모습. 왼쪽부터 1998년 로레알-유네스코 세계여성과학자상을 국내 최초 수상한 유명희 박사, 올해 학술진흥상 수상자인 임미희 카이스트 교수, 2019년 로레알-유네스코 한국여성과학자상 펠로십을 수상한 김필남 카이스트 교수, 올해 펠로십 수상자인 강미경 고려대 교수. 최지현 기자. |
◆"세상은 과학을 필요로 하고 과학은 여성을 필요로 한다"
해당 상은 ‘세상은 과학을 필요로 하고 과학은 여성을 필요로 한다’는 믿음 아래 과학 분야에서 여성의 권익을 증진하고 다양성을 바탕으로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개최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날 시상식에선 30대~60대의 각 세대를 대표하는 국내 여성과학자를 한자리에 모아 ‘글로벌 무대를 향한 한국의 여성과학자들의 여정’을 주제로 패널 토크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선 여성과학자로서 겪었던 구조적 성차별의 어려움과 리더급 여성 과학자의 사회적 가시화 등의 사회적 구조 및 제도 개선을 위한 여러 제언이 나왔다. 과거에 비해 눈에 보이는 구조적 성차별은 정부 주도로 상당 부분 개선한 측면이 있지만, 여전히 교육계와 과학기술계의 리더십에서 여성 과학 리더를 찾기 어렵다는 아쉬움을 공통으로 지적했다.
사무엘 뒤 리테일 로레알코리아 대표는 “끊임없는 탐구와 도전을 통해 과학의 경계를 확장하고 있는 올해 수상자들의 열정과 성취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며 “로레알 그룹은 전 세계 여성과학자의 역량 강화와 연구 환경 개선을 위해 지속적으로 힘을 보태고 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여성 인재들이 과학기술 발전의 중심에서 빛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화장품 등 뷰티 전문 기업인 로레알의 로레알재단과 국제연합(UN·유엔) 산하 전문기구로 인류와 각국의 문화·예술·교육을 장려·진흥하는 역할을 수행 중인 유네스코 위원회는 전 세계적으로 1998년부터 27년째 여성과학자상을 수여하고 있다. 매년 전 세계 5개 지역에서 각 1명(총 5명)의 탁월한 여성과학자를 선정한다. 현재까지 총 137명이 수상했으며 이 중 7명은 여러 과학 분야의 노벨상 여성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이와 연계해 개별 국가에서도 여성과학자상이 개최 중이며 우리나라에선 여성생명과학기술포럼과 함께 2002년부터 24년째 이어가며 총 105명의 여성과학자에게 한국 로레알-유네스코 여성과학자상을 수여했다.
지난 16일 서울 잠실 소재 소피텔 앰배서더 서울에서 진행한 ‘제24회 한국 로레알-유네스코 여성과학자상’ 시상식에서 발언 중인 사무엘 뒤 리테일 로레알코리아 대표. 최지현 기자. |
최지현 기자 jhcho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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