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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16일 경기 오산시 가장교차로 고가도로 옹벽이 무너진 현장에서 소방관들이 매몰된 차량과 인명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 제공·뉴스1 |
2017년 6월 14일 새벽. 영국 런던 24층 규모 그렌펠 타워에 불길이 치솟았다. 고작 냉장고 결함으로 시작된 불길은 서너 시간 만에 120가구의 보금자리를 골조뿐인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현장에서 수습된 시신만 70구가 넘었다. 10년 동안 영국에서 발생한 화재 중 최악인 그렌펠 참사. 그러나 수년간 주민들이 거듭한 안전 관리 신고와 불만 제기에 당국이 단 한 번이라도 관심을 기울였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 그렌펠 주민들은 온라인과 편지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참사 2년 전부터 방화문 고장과 대피경로 문제 등을 시당국에 알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관청은 이들을 '불평꾼' 정도로 취급하면서 신고를 뭉갰다. 결국 주민들이 그토록 외쳤던 각종 문제가 참사의 원인이 됐고, 당국은 뒤늦은 후회를 해야 했다. 영국 정부 사고 조사는 지난해 가을에야 종지부를 찍었다. 그 최종 조사보고서엔 "주민 경고를 경청했다면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는 평가도 함께 실렸다.
□ 100년 가까이 안전관리 금언으로 거론되는 '하인리히 법칙'은 참사 1건에 잠재적 징후가 300건 앞선다는 내용이다. 뒤집어 보자면 참사를 막기 위해선 300건에 달하는 징후를 빠짐없이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이들 징후에는 그렌펠 주민들이 외쳤던 것과 같은 주민신고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렌펠과 반대로 신고가 존중받아 참사를 막았던 사례도 적지 않다. 2007년 사이클론으로 국가적 위기를 맞았던 방글라데시에선 민관의 기민한 정보교환으로 수천 명이 목숨을 구했다.
□ 폭우가 쏟아진 16일 경기 오산시에서 옹벽이 무너져 아래를 지나던 차가 매몰돼 40대 운전자가 숨졌다. 하루 전 우천 시 옹벽 붕괴를 우려하는 주민신고가 당국에 접수됐음에도, 통제가 이뤄지지 않아 빚어진 결과다. 멀리 영국 사례를 볼 것도 없다. 불과 2년 전 오송에서 겪었던 주민신고 묵살이란 뼈아픈 실수를 그새 잊은 것 아닌가. 올여름 극한호우는 한동안 더 이어질 텐데, 얼마나 많은 주민신고가 또 허공으로 날아가 사고예방 골든타임을 놓칠지 큰 걱정이다. 그렌펠과 오송의 가르침이 부디 오래 남아있기를 바란다.
양홍주 논설위원 yanghong@hankook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