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존 마우체리가 쓴 '전쟁과 음악'
서울시향과 협연하는 피아니스트 임윤찬 |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클래식 음악 팬이라면 연말에 바쁘다. 내년 공연 스케줄을 발표하는 악단과 공연 단체가 많기 때문이다. 레퍼토리는 대개 비슷하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등 주로 독일·오스트리아 작곡가들의 작품이 많다. 21세기 들어 말러의 교향곡이 비교적 자주 연주된다는 것이 그나마 새로운 정도다. 옛것에 지친 음악 팬들이 새로운 곡보다는 연주자에 집중해서 내년 공연 리스트를 짜는 이유다.
우리나라만 그런 건 아니다. 세계 문화 수도를 자처하는 뉴욕이나 베를린도 국내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밀레니엄으로 넘어가던 1999년 12월 31일, 뉴욕 필하모닉은 19세기 초에 쓰인 베토벤 '9번 교향곡'(1824)으로 지나가는 20세기를 기념했다. 미국산 음악은 전혀 없었고, 뉴욕필이 지난 100년간 작곡가에게 위촉한 20세기 음악도 보이지 않았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베토벤과 드보르자크를 기본 레퍼토리로 한 후 말러 '교향곡 5번'(1902), 스트라빈스키 '불새'(1910) 등 20세기 초기작품까지만 선보이는 데 그쳤다.
이처럼 뉴욕필과 베를린필이 20세기를 끝내는 동시에 21세기를 여는 공연에서 집중한 건 이른바 클래식 '정전'(正典)이라 불리던 곡들이었다. 대부분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 작곡가들이 1710년경부터 1930년 사이에 쓴 작품들을 말한다.
지휘자이자 음악 교육자·작가인 존 마우체리는 신간 '전쟁과 음악'(에포크)에서 이 같은 현상을 한탄한다.
"다른 모든 예술 형태는 20세기와 21세기에 접어들어서도 시대를 초월하는 새로운 걸작을 내놓으며 계속 성장하고 있는데, 왜 클래식 음악의 정전은 명맥이 끊기고 말았을까?"
베를린 필 이끈 클라우디오 아바도 |
'전쟁과 음악'은 20세기 초부터 현재까지 클래식 정전이 사멸한 이유를 탐구한 책이다. 20세기 작곡가와 그들의 저평가된 작품을 꾸준히 조명해온 저자는 20세기 양차 대전과 냉전을 거치며 잊힌 작곡가들의 작품을 책에서 소환한다.
책에 따르면 20세기 들어 클래식 음악은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해갔다. 파리에 거처를 둔 스트라빈스키, 빈에서 활동하는 쇤베르크는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들고나왔다. 특히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악곡의 중심이 되는 조성이 없는 음악)은 혁신 그 자체였다. 이 기간 "춤출 수 없는 발레, 노래할 수 없는 노래가 등장"했고, 유럽문화가 1천년간 가꿔온 화성 법칙이 모조리 파기됐다. 푸치니, 미요, 거슈윈 등 많은 음악가가 대담한 도전에 나섰다. 음악의 '빅뱅'이 발생한 시기였다. 작곡가들은 자본주의가 극심한 빈부격차를 낳고, 전운이 팽배했던 당대의 불안했던 시대 공기를 작품에 담아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1차 대전이 발생하자 이런 모든 시도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쇤베르크는 42살에 조국 독일 군대에 입대했고, 라벨은 병약해 참호전에 뛰어들진 못했지만, 프랑스 병사들을 위해 보급품을 실어 날랐다. 쉰둘의 드뷔시는 암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벙커로 피신하지 못한 채 포화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전쟁을 지지했던 스트라빈스키는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입대를 거부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
전쟁이 끝나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했다. 1차 대전을 겪은 사람들은 유럽 음악의 최전선인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등의 음악을 "전쟁의 광기에 동조한 공모자"로 여겼다. 전쟁 패배와 막대한 배상금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틈을 타 파시즘이 유행한 독일에선 유대인 작곡가들이 핍박받았다. "독일 유대인들의 음악은 아름답고 희망을 주는 음악을 교묘히 모방함으로써 '진정한 독일 음악'에 침투해 나라를 장악하려 한다는 이유로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다.
왈츠로 유명한 슈트라우스 가문은 유대성을 의심받았다. 쇤베르크는 모두가 다 아는 유대인이었다. 이 때문에 당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던 쇤베르크의 음악은 철저히 삭제됐다. 스탈린이 이끈 러시아에서도 아방가르드(전위) 음악은 부르주아 음악으로 취급받았다. 이런 스탈린의 압제 속에 숨죽인 쇼스타코비치는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서 보여준 현대성을 버리고 '교향곡 5번'과 같은 고전의 세계로 전향했다. 무솔리니가 다스린 이탈리아에서도 혁신적 오페라들은 금지됐다.
푸치니 '투란도트' |
이런 방식으로 도전적이고, 전위적이었던 현대 클래식 음악가들의 음악은 세상에서 잊혔다. 학계와 음악 평론가들도 제도권 내의 음악, 즉 정전에만 매몰돼 새롭고 다양한 시도를 외면했다. 20세기 전반기를 수놓은 혁신적인 쇤베르크, 힌데미트, 코른골트, 번스타인 등의 음악들은 음악 교과서에는 남았으나 공연장에선 점차 사라져갔다.
저자는 "20세기는 크게 보아 상실의 세기였다. 그 상실은 뼈아프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한때 자주 연주되고 향유된 음악을 쓴 여러 작곡가를 배제했다"고 말한다.
"클래식 정전에 생긴 75년이나 지속된 거대한 공백이 우리 시대 관객의 손을 붙잡을 접점을 상실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오늘날 태어난 아기는 나중에 장성해 동시대 작곡가로 누구의 이름을 꼽을 수 있을까."
이석호 옮김. 420쪽.
'전쟁과 음악' 표지 |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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