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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혁명이 되려면 [이진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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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혁명이 되려면 [이진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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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대통령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이후 시민들이 응원봉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2024년 12월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대통령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이후 시민들이 응원봉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이진순 | 성공회대 겸임교수



내 책상은 온갖 잡동사니로 어수선하다. 피사의 사탑처럼 쌓인 서류 더미가 쓰러지기 직전에야 이것저것 가려내서 버리거나 따로 보관하는데 주섬주섬 정리를 하다가, 순간 멈칫했다. 이 물건들을 어찌할꼬? 고급 양주처럼 단단한 원통형 단지에 담긴 응원봉, 그리고 손바닥 크기로 고이 접힌 은박담요.



지난겨울 형형색색 응원봉 물결에 반해 제법 비용을 치르고 구입한 응원봉은 막상 들고 흔들려니 어깨가 쑤셔대서, 두어번 들고 나가 동네방네 자랑질한 이후 더 사용하지 못했다. 은박담요는 하루도 빠짐없이 광장을 지켰던 젊은 동료가 챙겨준 것인데, 옛날 운동권 노래를 모르는 청년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 ‘불나비’ 같은 노래를 부르려고 노랫말을 인쇄한 작은 쪽지가 끼워져 있다.



이 물건들을 혹여 다시 쓰게 될까? 8년 전 촛불집회로 운집했던 그 자리에 다시 응원봉을 들고 나가 혹한의 겨울밤을 보냈던 것처럼, 그런 날이 또 올까? 대통령이 바뀌고 우린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윤석열이 재구속되고 국민의힘은 자중지란 중이고 극우 폭동세력도 주춤하니 당분간 거리낄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우리 일상은 여전히 고단하고 우울하다. ‘빛의 혁명’이란 수사만 남긴 채 광장은 사라졌다.



빛의 광장은 아름다웠다. 서로 다른 배경의 시민들이 존중과 공감, 연대의 정신으로 화합했다. 평등한 개체로 만나 수평의 연대체를 이루고 서로를 배려하는 광장은 이상적인 시민학교였다. 탈중심적인 수평적 연대, 자율적이고 비위계적인 참여,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경청, 광장은 그 자체로 ‘다시 만난 세계’였다. 나는 한때 이런 새로운 유형의 시민행동에 매혹되었고 그것이 혁신적 변화를 불러오리라 기대했다.



2011년 스페인의 15엠(M)운동엔 무대와 관객을 가르는 단상이 따로 없었다. 미국의 월가 점령시위는 주코티 공원에 캠프를 형성하며 공동체적 해방구를 만들었고, 2019년의 홍콩 민주화 시위는 ‘리더 없는 리더십’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혁명은 없었고 반동의 질서는 더 공고해졌다. 광장의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분권체계가 훌륭한 민주주의 학교가 될 수는 있지만 현실의 완강한 권력질서를 재편하는 정치적 무기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그리고 아프게 인정한다.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월가 점령시위를 두고 ‘환상적 폭발’이었지만 조직적 연속성이 없어 ‘풍선처럼’ 꺼져버렸다고 혹평했다. 탈중심적 자율적 시민행동은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걸 전시할 순 있어도 실제 권력을 재편하거나 체제 변화를 이끌진 못한다는 얘기다. 리더 없는 리더십은 ‘누구나 참여하고 누구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개방적 수평적 구조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아무도 책임지지 못하고 아무도 전략적 결정을 하지 못하는’ 무능과 혼돈에 빠진다. 홍콩시위가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1700여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내란청산·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은 그간 11개 분과별 토의와 시민토론회, 온라인 토론 등을 거쳐 분과별 사회대개혁 의제를 도출했고 지난달 21일에는 ‘이재명 정부의 우선 개혁정책과제’를 주제로 시민토론회를 벌여 114개 개혁과제를 선정했다. 그러나 이것을 누가 어떻게 관철할 것인가? 광장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차별금지법은 새 정부에 의해 다시 나중으로 미뤄지고 대선 전 후보가 언급했던 개헌 이야기는 쑥 들어갔다. ‘순수한’ 시민의 역할은 늘 이렇게 끝나고 마는 건가?



광장의 무력함 앞에서, 미국 민주당 조란 맘다니 뉴욕시장 후보의 사례는 신선하다. 올해 2월까지 1% 지지율에 불과하던 33살의 인도계 무슬림 조란 맘다니는 무료 버스, 주택 임대료 동결, 보편 보육 확대를 내세워 자원봉사자들을 조직하고 100만가구 ‘문 두드리기’ 운동을 벌였다. 뉴욕주지사를 지낸 앤드루 쿠오모를 누르고 민주당 후보가 된 그는 지난달 25일자로 문 두드리기가 150만회를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월가 점령시위가 실패한 곳에서 이룬 개가다.



우리와 다른 경선 룰, 도널드 트럼프에게 맞설 전투적 신예를 환영하는 현지 상황 등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우리가 새겨둘 교훈은 분명하다.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시민이 피부로 느낄 변화를 정치적으로 의제화하는 것, 현장의 발품 팔기로 시민과 직접 소통하고 지지자를 조직하는 것이 가장 고전적이지만 가장 핵심적인 요건이라는 점이다. 빛은 잠깐일 뿐, 혁명이 되지 못한다. 빛나는 구슬을 꿰어 정치적 주체로 조직하지 못하면 광장의 빛은 소멸한다. 극우세력과 내란세력은 그때를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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