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교대역에 채무 상환 관련 광고가 붙어 있다. 연합뉴스 |
류이근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함무라비 법전은 가장 오래된 성문법 가운데 하나다. 세계사 시간에 배워 친숙한 이 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유명하다. 기원전 18세기 메소포타미아 지역 바빌로니아에서 만든 법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홍수나 가뭄으로 농작물 피해가 심한 해에는 채무를 면제한다. 채무자의 상환 능력을 고려한 조항이다. 채권자 권리와 채무자 의무를 담은 법전은 채무의 유효 기간을 두기도 했다. 예를 들어 빚을 져 가족을 볼모로 넘겨주더라도 4년째는 채권자가 풀어줘야 한다. 또 이자율 상한과 부당한 채권 집행 금지 내용도 담았다.
이러한 고대 법체계와 정신에도 미치지 못하는 일들이 21세기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9월 유치원에 다니는 딸을 홀로 키우던 30대 여성이 불법 사채업자로부터 추심 압박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수십만원을 빌린 뒤 연이율 수천%에 이르는 이자를 물었다. 상환이 늦어질 때는 1분에 10만원을 추가로 요구받기도 했다. 제때 빚을 갚지 못하자 사채업자들은 가족과 지인들에게까지 연락하며 협박했다. 그는 어린 딸에게 “부모라는 울타리조차, 든든한 버팀목조차 되어주지 못해 너에게 큰 짐이 되고, 걸림돌이 되어 미안해”라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음으로 기한 없는 빚의 사슬을 끊어낼 수밖에 없었다.
추심은 불법과 합법의 애매한 경계선을 수시로 넘나들며 지금도 어디선가 또 다른 피해자를 낳고 있다. 출퇴근길 상가나 도롯가에서 ‘당일 즉시 대출’, ‘신분증만 있으면 대출 가능’이란 문구 등과 함께 전화번호가 박힌 대부업체 명함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곳곳에 걸려 있는 ‘못 받은 돈 받아드립니다’라는 펼침막 광고는 이와 묘하게 대비된다.
지난 4일 국회는 올해 2차 추가경정예산안을 통과시켰다. 31조8천억원 규모 예산에는 5천만원 이하이면서 7년을 넘긴 연체 채권을 매입해 소각하거나 상환 부담을 덜어주는 장기 연체 채권 소각 프로그램이 포함됐다. 취약계층과 소상공인의 채무 부담을 덜어줘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비판이 쏟아졌다.
반대 논리는 크게 두가지다. 첫번째는 도덕적 해이다. 부채를 탕감하거나 감면해주면 기대 심리가 작동해 일부러 빚을 갚지 않는 악의적 채무자가 늘어날 것이란 우려다. 하지만 언제 부담을 덜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태에서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데도 7년씩 버티는 ‘자발적’ 채무 불이행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 기간 경제활동에 온갖 제약을 받으면서 추심에 시달려야 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빚도 대물림되는 현실에서, 7년으로 채무의 유효 기간을 못 박는다는 점이 마뜩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바빌로니아는 간헐적으로, 또 유대 사회에서는 7년마다 주기적으로 빚을 탕감했다. 사회적 갈등과 붕괴를 막고, 통합을 위한 조처였다고 한다.
두번째 비판 논리는 형평성이다. 다 갚지 않은 사람의 빚을 없애거나 줄여주면 성실하게 빚을 갚은 사람만 손해란 주장이다. 이는 채무자의 능력과 상황을 모두 동일하게 놓고 본다는 데 문제가 있다. 취약한 차주 가운데서도 더욱 취약한 차주의 열악한 상환 능력과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 비교하는 식이다. 그 바탕에 장기 연체자는 성실하지 않은 사람이란 편견이 깔렸다.
형평성과 도덕적 해이는 오랫동안 채무 조정 정책을 최소화하고 소극적으로 집행하는 논거로 쓰였다. 사실 채무 조정은 언뜻 생각하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든다. 장기 연체 관련 사업 예산은 2차 추경의 1.3%에 해당하는 4천억원이다. 여기에 추가로 금융회사로부터 4천억원을 출연받을 계획이다. 지렛대 효과처럼 8천억원으로 약 113만명의 장기 연체 채권 16조4천억원어치를 평균 5% 가격에 매입한다는 구상이다. 부채를 털어낸 정책 수혜자가 좀 더 자유롭게 경제활동에 참여하게 되면 경제 전체로 봤을 때도 효용이 커진다.
선진국 가운데서도 한국은 부채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이 강한 나라에 속한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 최근 연체율이 올라가고 있지만, 다른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반면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 비해 채무 조정 대상이나 폭은 인색하다. 정부가 소각을 중심으로 채무 조정 프로그램을 짠 건 잘한 결정이다. 하지만 일회성 계획을 세운 건 아쉽다. 효과를 봐가면서 프로그램 대상을 더 확대하는 것도 열어놔야 한다.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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