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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도 국정과제 넣은 ‘이 법’…국회가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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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도 국정과제 넣은 ‘이 법’…국회가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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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지난달 17일 차별금지법 제정을 국정과제로 채택할 것을 촉구하는 시민 1만여명의 서명을 모아 대통령실에 제출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제공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지난달 17일 차별금지법 제정을 국정과제로 채택할 것을 촉구하는 시민 1만여명의 서명을 모아 대통령실에 제출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제공


“이런 건 국회가 하는 게 좋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3일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에 대해 국회로 공을 넘기는 유보적 입장을 밝혔다.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도 14일 국회 인사청문회 답변서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은 갈등 요소가 많은 사항”이라며 “국민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런 정부의 입장에도 시민사회단체들은 “국가 차원에서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계획을 내놔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12·3 내란 사태를 거치며 차별금지법 제정은 절실한 광장의 목소리가 됐다고 강조한다.



내란 사태 국면은 민주주의 헌정 질서에 반하는 극우세력의 부상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극우세력은 차별과 혐오에 바탕해 성장했다. 시민단체들이 ‘광장 정치’로 탄생한 새 정부에 혐오와 차별에 대응할 기본법제를 정비하는 최소한의 역사적 책무가 있다고 보는 이유다.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는 “군이 개입한 비상계엄령은 단지 권력의 폭주가 아니다. 그 배경에는 분리와 단절을 조장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 있었다”며 “(윤 전 대통령은) ‘반국가세력’이 북한과 중국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며, 정권에 비판적인 시민, 정치인, 언론, 활동가들을 ‘척결대상’으로 낙인찍었다. 이런 발언은 사회 전반에 혐오와 차별의 정서를 확산시키고 갈등을 조장했다”고 짚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차제연) 집행위원인 조혜인 변호사는 “혐오와 차별을 막을 법제는 미루면 미룰수록 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정치권이 차별금지법을 ‘동성애 보호법’이라며 반대하는 목소리에 침묵으로 동조하는 동안, 여성·성소수자·이주민 등을 향한 혐오가 강화됐다는 뜻이다.



국제사회도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와 자유권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중간 이행 보고서를 각각 2026년 6월2일, 11월3일까지 제출하라고 요청한 상태다. 특히 여성위는 정부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구체적인 타임라인을 설정하라”고 권고했다. 유엔은 여성차별철폐협약,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약칭 ‘자유권규약’) 등 각종 협약·규약에 서명 또는 가입한 국가를 상대로 그 내용을 지키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심의한 뒤 후속 조치를 담은 보고서까지 제출하도록 하는데,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라는 것이다. 유엔 기구들은 2007년부터 올해까지 14차례 한국 정부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한 바 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지난달 17일 차별금지법 제정을 국정과제로 채택할 것을 촉구하는 시민 1만여명의 서명을 모아 대통령실에 제출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제공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지난달 17일 차별금지법 제정을 국정과제로 채택할 것을 촉구하는 시민 1만여명의 서명을 모아 대통령실에 제출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제공


차별금지법 제정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공약이었을 정도로 오랜 과제였다. 1999년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 2007년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등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됐으나, 성별 정체성과 장애뿐 아니라 나이, 인종, 학력, 성적 지향 등이 겹쳐진 복합차별을 다룰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좌초됐다. 보수 정권인 박근혜 정부도 국정과제로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을 포함하는 ‘형식적 시늉’은 했다. 이명박 정부는 법무부 산하에 ‘차별금지법 특별분과위원회’를 운영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정부가 정말 의지가 있다면 국회가 법을 만들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않는다”며 “혐오와 차별 방지에 관한 국제규범이나 지침들은 정치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한다”고 했다. 보수정당 소속인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가 현직일 때 “혐오는 독일에 설 자리가 없다”고 강조한 것이 독일에서 민주적 기준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13년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전신) 소속 김한길·최원식 의원이 각각 차별금지법안을 대표 발의했다가 보수 개신교의 집요한 반발에 밀려 철회했다. 시민단체들은 이 사건을 이후 민주당계 정당·정부에서 유보·방관적 입장을 갖게 된 분기점이라고 본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의원 시절 차별금지법 발의에 참여하고 2012년 대선 공약에 포함했으나, 2017년 대선 공약에선 제외했다. 윤석열 정부는 더 후퇴했다. 지난해 제4차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에서 최초로 차별금지법 제정 방안을 마련한다는 내용을 삭제한 것이다.



최근 성신여대에는 “여성이 싫다”며 폭발물을 설치했다는 협박 메일이 전해져 학생들이 대피하는 일이 벌어졌다. 조 변호사는 “누군가는 이 사회에서 평등하지 않은 시민이라는 걸 인정하라는, 민주적 가치를 공격하는 목소리를 정부가 방치하는 자체가 사회안전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차제연은 지난 3일 논평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시민적 합의로 만들어나갈 전망을 국가 차원에서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 시민들의 요구”라고 짚었다. 차제연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국정과제로 포함해달라는 시민 1만여명의 서명을 모아 지난달 17일 대통령실에 제출한 상태다.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도 지난달 30일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를 포함한 ‘12·3을 넘어 인권으로 응답하라’ 캠페인을 시작해, 국회와 정부에 제출할 시민 서명을 모으고 있다. 이들은 “차별과 혐오가 정치적 도구가 되는 세상은 결국 모두의 인권을 위협한다”면서 “성별, 장애, 나이, 출신지,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종교, 인종 등 그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는 것은 모두가 안전하고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의 기본조건”이라고 밝혔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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