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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면 어떠냐, 그냥 살면 되지" 우울증에 빠진 미지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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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면 어떠냐, 그냥 살면 되지" 우울증에 빠진 미지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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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정신과 의사의 코멘터리]
<10>드라마 '미지의 서울'의 유미래·미지

편집자주

정신건강의학과 김지용, 오동훈, 허규형 전문의가 영화나 드라마 속 캐릭터들의 심리를 분석하며 우리의 마음도 진단합니다.


드라마 '미지의 서울'의 유미지(박보영). tvN 캡처

드라마 '미지의 서울'의 유미지(박보영). tvN 캡처


사람은 비교의 동물이다. 외모, 재산, 직업 등 모든 것을 끝없이 주변과 비교하는데, 고통의 크기 역시 그 대상이 된다.

“저 빼고 다 잘 사는 것 같아요.”

“저를 이해할 거라 기대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힘든 적도 없을 거잖아요. 편하게 살았을 거고.”

진료실에서 종종 듣게 되는 솔직한 속마음들이다. 이런 말을 꺼내는 이들 모두 다 실제로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있다. 하지만 자신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앞 진료를 본 분도, 그다음도 다 힘들다. 모두가 자신만의 전쟁을 치르며 살아가기에 겉만 보고 함부로 남의 인생을 평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마음에 여력이 없을 땐 공감도 안 된다. 타인의 공감이 절실한 이들에게서 막상 스스로의 공감 능력은 저하된 모습이 보이는 이유다.

진료실 바깥은 더하다. 공감 부족 시대다. 학교와 직장에서 상처받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사람이 무섭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온라인은 더하다. 서로를 깔아뭉개지 못해 안달인 모습투성이다. 공격적 태도보다 더 흔한 것이 냉소적 태도인데, 언젠가부터 온라인에서 자주 쓰이는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의 약어)이란 표현이 대표적이다. 직장 내 갑질, 전세 사기, 투자 실패 등 다양한 문제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공감과 이해 대신 누칼협이란 댓글로 비웃음을 건넨다. 고통에 공감 대신 비웃고, 성취에 축하 대신 깎아내리는 이 냉랭한 사회적 분위기는 대체 무엇 때문일까?

번아웃에서 우울증 사회로



'미지의 서울'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는 미래(박보영). tvN 제공

'미지의 서울'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는 미래(박보영). tvN 제공


냉소적 태도는 번아웃 증후군의 주요 증상 중 하나다. 번아웃에 빠진 이들이 다수를 이루는 사회는 번아웃 상태이다. 냉소적 분위기가 팽배한다. 물론 예전에는 더 힘들었는데 무슨 소리냐는 말이 나올 수 있는데, 원래 목표를 향해 한창 달릴 때보다 성취가 이뤄지고 난 후에 번아웃이 찾아오는 법이다. 지난 수십 년간 엄청난 노력을 통해 경제적 선진국이 되는 기적 같은 성취가 있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자연스레 번아웃이 왔다. 번아웃의 치료법은 휴식이다. 잘 쉬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고 스스로의 게으름을 비난하며 몰아붙이면 우울증으로 진행한다.


노력이 지난 기간 우리나라를 먹여 살렸지만, 노력이면 다 된다는 노력만능주의가 팽배하게 됐다. 그 때문에 지금 번아웃 상태에서도 노력에서만 답을 찾는다. 그 결과는 우울증이다. 많은 이들이 몰랐겠지만 한국 10대, 20대, 30대 모두 질병이나 사고가 아닌, 자살이 가장 큰 사망 원인이다. 최근 들어 10대 자살률은 크게 증가하고 있다. 번아웃 사회가 우울증 사회로 진행되고 있는 명백한 증거들이다. 이러니 타인에게 공감할 마음속 여력이 없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더 공감적인 사회가 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일견 암담하기도 하다. 지나치게 경쟁적인 분위기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 최우선이겠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당장 바뀌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개개인의 공감 능력 상승을 노려봐야 할 텐데, 나는 그나마 대중문화가 답이 될 수 있다 생각한다.

공감 능력을 기르는 데 독서의 효능은 여러 연구들을 통해 입증됐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평균 독서량은 계속 감소 추세에 있어 역대 최저 상태인데, 대신 기대를 걸어볼 곳이 드라마와 영화 같은 영상 콘텐츠다. 영상 시장 내에서도 쇼트폼에 밀리는 추세라지만, 그래도 화제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잡아낸 명작들이 계속 등장한다.


좋은 작품에는 사람을 바꾸는 힘이 들어 있다. 그래서 무기력에 종일 누워 있게 된다는 사람들에게 드라마 시청을 자주 권유한다. 물론 운동이 제일 좋지만 너무 무기력할 땐 어차피 안 되니까. 나는 TV 시청을 거의 안 하기에 대신 진료실에서 자주 들은 콘텐츠들을 추천한다.

상대로 살아보면 나의 고통은 평범한 불행



드라마 '미지의 서울'. tvN 제공

드라마 '미지의 서울'. tvN 제공


최근에는 ‘미지의 서울’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 드라마는 서울에서 금융공무원으로 일하는 유미래와 시골에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전직 육상선수 유미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쌍둥이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릇을 깨뜨리는 실수로 손이 베여 피가 뚝뚝 흐르는 알바생의 모습에 “좋겠다, 퇴근하네”라고 말하는 미래가 미지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게 힘들면 그냥 휴가를 쓰지, 왜 그만둔다는 말을 하지? “네가 거길 어떻게 들어갔는데 그만두냐. 다들 괜찮아서 사냐? 그냥 안 괜찮아도 참는 거지”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미래에게는 미지의 여유 있는 삶이 부러워 보이고,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하는 언니와 비교되며 살아온 미지에게는 미래의 서울 생활이 화려해 보인다. 그렇게 미래와 미지는 서로의 삶을 바꾸어 살아 보기로 결정하고, 실제 삶의 민낯과 그림자를 보게 된다. 미래가 자신 대신 서울의 회사를 다니는 미지에게 전화를 걸어 할머니 병원에 들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내게 특히 인상적이었다.


“너 지금 할머니보다 회사가 먼저라는 거야? 네가 맨날 나한테 한 말이잖아” (미래)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내가 지금 나 좋자고 그래? 다 널 위해서…” (미지)

“뭐가 다른데? 나도 나 좋자고 그랬던 것 아니야.” (미래)

실제로 정신과에서는 치료 목적으로 심리극을 진행할 때 역할 교환 기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서로의 역할을 바꾸었을 때 진정으로 그 사람이 처했을 상황과 지녔을 마음을 알게 된다. 내 오해를 깨닫고 새로운 이해가 열린다. 프로이트는 정신치료에 대해 ‘신경증적 비극을 평범한 불행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라 말했다. 나는 힘든데 남들은 모두 잘 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내 삶은 특별한 비극이 된다. 하지만 상대방의 삶을 살아보면 나의 고통 역시 평범한 불행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부터는 과도한 자기연민에서 헤어나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미지와 미래는 타인의 삶을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보게 되고, 결국 성장한다. 그 모습을 보여주는 이 드라마는 한 편의 긴 심리극 같았고, 일종의 정신치료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배우 박보영이 1인 2역으로 연기한 미지(왼쪽)와 미래. tvN 제공

배우 박보영이 1인 2역으로 연기한 미지(왼쪽)와 미래. tvN 제공


삶의 의미는 하나가 아니다


단순히 역지사지의 내용만 담긴 것이 아니다. 드라마 속에서 발견한 여러 정신치료적 메시지들 중 이 지면을 빌려 꼭 말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 촉망받는 육상 선수였던 미지는 부상으로 그 꿈을 잃고 우울증에 빠져 3년째 집에서 나오지 않는다. 진료실에서 정말 자주 보는 모습이다. 그들 모두 무언가를 상실한 뒤 무너졌다. 어릴 때부터 전부라고 느껴온 명문대 입학의 기회를, 소중한 친구 관계를, 사랑하던 사람을.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상실감에만 빠져 다 놓아버렸다. 이럴 때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까?

과거 모든 걸 잃어버린 정신과 의사가 있었다. 나치 수용소에 갇혀 가족들을 다시 만날 그날만 기다리며 3년을 버텨낸 빅터 프랭클(1905~1997)은 전쟁이 끝난 후 아내와 부모, 형이 모두 사망했단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야말로 모든 걸 상실했다. 누구라도 삶을 놓아버릴 만한 그 상황 속에서, 그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도록 돕는 ‘로고 테라피’ 치료법을 창시해냈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며 그 의미를 발견할 때 고통도 견딜 수 있다. 또한 삶의 의미는 그 어떤 순간에도 새롭게 찾아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삶의 의미는 하나가 아니다. 삶의 의미를 이루는 작은 조각들을 계속 모아 나가는 것이 우리의 삶일 테다.

'미지의 서울'에서 미지 가족의 정신적인 버팀목이 돼주는 할머니(차미경). tvN 제공

'미지의 서울'에서 미지 가족의 정신적인 버팀목이 돼주는 할머니(차미경). tvN 제공


드라마 속 빅터 프랭클로 미지의 할머니가 등장한다. 할머니는 상실감에 빠져 아무것도 안 될 것이라는 미지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알려준다. "그럼 어떠냐, 그냥 밥 잘 먹고 가끔 할머니 말동무 해주면서 살면 되지"라는 그 말이 멈춰 있던 미지의 시간을 다시 흘러가게 만든다. 그리고 나중에 미지는 상담사가 되는 길을 꿈꾸며 대학에 입학한다. ‘상처받은 치유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과거 정신과 의사 칼 융은 치료자가 가진 상처의 경험이 환자를 더 깊이 이해하고 돕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고 돌볼수록 타인의 고통도 더 진심으로 다룰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렇게 고통을 승화시킨 삶을 만드는 사람들을 진료실에서 꽤 자주 보게 된다.

나만 힘든 것 같다고 느껴진다면, 너만 힘드냐는 주위의 말들에 지쳤다면 좋은 드라마 한 편 보시면 좋겠다. ‘미지의 서울’을 통해 묵묵한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망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지금 삶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의미를 다시금 발견하게 됐으면 좋겠다. 이렇게 회복된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면 이 사회의 냉소적 분위기가 녹는 그날이 언젠가 올 테니 말이다.

김지용 연세웰정신건강의학과의원 대표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