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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성철 스님과 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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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성철 스님과 수박

서울맑음 / -3.9 °
이 무더위가 언제쯤 가시려나. 예전에 비하면 무더위를 다스리는 첨단 장비를 갖추었는데도 나아진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내가 느끼는 것은 마음의 더위인가, 아니면 기후위기 영향인가?

옛날에는 시원한 수박화채 한 그릇이면, 한여름 더위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여름 과일은 뭐니 뭐니 해도 달고 수분 많은 수박이 최고다. 땀 흘린 후 먹는 수박화채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서늘해진다. 무더운 여름, 사찰에서 즐겨 먹는 과일도 수박이다.

수박에 얽힌 성철 스님의 일화를 소개한다. 한번은 성철 스님이 계신 사찰에서 기도를 드리던 신도들이 모여 수박을 나눠 먹었다. 거기까진 별 탈 없었다. 그런데 먹고 남긴 수박 껍질이 문제였다. 너나없이 수박의 벌건 속살을 반만 먹고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 성철 스님 눈에 들어온 것이다. 노발대발하신 성철 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돈은 너거 돈으로 수박을 사 왔는지 모르지만, 먹기는 농부들 정성을 생각하고 먹어야 하지 않겠냐? 그러려면 수박 껍질이 하얗게 나오도록 먹어야 할 것인데, 반도 안 먹고 버렸으니, 기도하지 말고 싹 다 가든지, 아니면 쓰레기통에 처박아 놓은 수박을 다시 꺼내 먹든지 둘 중에서 하나를 빨리 선택해라.”(원택, <성철 스님과 나>) 신도회장이 백배사죄하고 쓰레기통을 다 뒤져 하얀 속살까지 다시 먹은 것은 물론이다. 예전에 어디선가 읽은 성철 스님의 또 다른 일화가 떠올랐다. 행자승이 설거지하며 밥풀 서너 알을 흘려보내는 것을 본 성철 스님이 가만두실 리 없다. 냅다 소리를 지르시니, 행자승이 기겁하며 그 밥알 서너 개를 다시 주우러 개울 아래쪽까지 줄달음을 쳤다는 이야기다.

입안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소홀히 한다면, 입 밖으로 내뱉는 말도 미덥지 못하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은 누군가의 피땀 어린 정성 아니겠는가. 말은 쉬워도 꼬박꼬박 지키기는 어렵다.

수박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아내는 수박의 하얀 속살까지 먹는다. 성철 스님을 뵌 적도, 법문 한번 들은 적도 없는 아내는 이를 실천한다. 그렇다고 깊은 속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하얀 속살이 아까운 것이다. 심지어 하얀 속살을 깎아 특별한 김치까지 담글 요량이다. 아들 녀석은 ‘제발 궁상 좀 그만 떠시라’ 지청구한다. 아들 말에 공감하면서도, 성철 스님 일화를 생각하면 아내의 궁상에 잠시 너그러워진다. 숟가락으로 푹푹 떠서 만든 수박화채가 생각난다. 흰 속살이 듬뿍 든.


이선 한국전통문화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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