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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가 길을 잃지 않으려면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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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가 길을 잃지 않으려면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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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이 6월1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청사에서 열린 경제 6단체와 기업인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재명 대통령이 6월1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청사에서 열린 경제 6단체와 기업인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홍식 |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복지국가재구조화연구센터장



윤석열이 끼친 해악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나라를 윤석열 이전으로 돌려놓는 것만도 벅찬 일이다. 게다가 미국과의 관세 협상은 물론 잠재성장률이 1%대로 떨어진 경제와 엉망진창이 된 민생까지 챙겨야 한다. ‘이재명’이 아니라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쉽지 않다.



이럴 때는 입을 꾹 다물고, 갓 출범한 정부를 지지하며 격려하는 것이 정답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집권 초 국정운영 기조가 정권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특히 산업정책, 복지국가, 균형발전 등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중장기 과제는 집권 초에 방향을 잡고 자원을 목적 의식적으로 배분해 두지 않으면, 임기 후반에는 추진하기 어렵다. 민주화 이후 모든 정부가 그랬고 이재명 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단임제 대통령의 숙명이다.



비판적 지지가 절실한 이유다. 더욱이 내란을 막았던 수많은 시민이 원하는 세상은 윤석열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윤석열 이전,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였나? 지난 30년 동안 성장률은 9%에서 2%대로 내려앉았고, 괜찮은 일자리는 자동화와 유연화로 급감했다. 그러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자녀의 삶을 결정하는 나라가 됐다. 노력만으로는 사다리를 오르기 어려운 구조가 된 것이다.



성장과 일자리만 문제가 아니다. 자살률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높고 합계출산율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 갤럽이 발표하는 세계행복보고서를 보면,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33위에 그치고 있다. 우리가 윤석열을 탄핵하고 정권을 교체한 것은 과거의 대한민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더 나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시민의 힘으로 탄생한 이재명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그 시작은 이 대통령이 이야기한 ‘진짜’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공약을 정리해 국정과제로 만들고, 개별 제도와 정책을 개혁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가 만들려는 ‘진짜’ 대한민국의 모습이 불분명하다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개혁들이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상법 개정과 인공지능(AI) 정책을 보자. 이 대통령이 공약했던 상법 개정은 여야 합의를 통해 국회를 통과했다. 왜곡된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주주의 권익을 강화하며, 경영 투명성을 높이려는 조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주주 권리 강화가 한국 산업구조에 맞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제조업이 성장의 엔진인 한국 경제에서 주주 권리 강화는 자칫 기업을 장기 전략보다 단기 이익에 매달리게 할 수도 있다. 주주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영국과 미국이 제조업 경쟁력을 스스로 무너뜨린 사례를 보라. 한국도 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다. 금융산업으로 성장 동력을 전환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시급히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인공지능을 제조업의 신성장 동력으로 삼은 것도 논의가 필요하다. 잘 알다시피 한국은 노동자 만명당 로봇 사용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나라다. 지난 30년간 한국 대기업 집단은 노동자의 숙련을 기술로 대체해 놀라운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일자리 측면에서 보면, 기술 중심 성장은 좋은 일자리를 줄이고 나쁜 일자리를 늘리며 기업 규모에 따른 임금 격차를 심화시켰다. 좋은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대책 없이 인공지능 역량만 강화하는 것은 가뜩이 심각한 사회경제적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



개별 정책 차원에서 보면 상법 개정도, 인공지능 정책도 모두 좋은 정책일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정책들을 모은다고 한국 사회가 더 살 만해지는 것은 아니다. 정책 간 제도적 상호 보완성이 없거나 낮으면 개별 정책의 성과는 물론 국가 차원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렵다.



이 대통령이 추상적 논의에 관심 없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 분명한 성과가 있는 정책과 제안을 선호한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가 단순히 윤석열 이전으로의 회복이 아닌,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면 ‘진짜’ 대한민국의 비전과 전략이 필요하다. 비전과 전략은 추상적 논의나 공허한 이야기가 아니다. 매번 고치고 다듬어야 하지만, 비전과 전략은 실용주의가 길을 잃지 않게 하는 나침반이다. 성공적 개혁은 장기적인 비전과 단기적인 전술이 모두 필요하다.



나침반 없이, 어떻게 격변하는 세계를 헤쳐 갈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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