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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로 10 가주세요” 실크로드서 사바나까지, K주소가 길을 낸다 [Deep&w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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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로 10 가주세요” 실크로드서 사바나까지, K주소가 길을 낸다 [Deep&w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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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국내외 주요 이슈들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깊이 있는(deep) 지식과 폭넓은(wide) 시각으로 분석하는 심층리포트입니다


이동식 게르가 우후죽순 밀집한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외곽 서민 거주지역. 도로명 주소를 바탕으로 사물주소 등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한국형 주소체계를 도입, 이 지역의 위치정보를 선진화하려는 게 몽골 정부의 구상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동식 게르가 우후죽순 밀집한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외곽 서민 거주지역. 도로명 주소를 바탕으로 사물주소 등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한국형 주소체계를 도입, 이 지역의 위치정보를 선진화하려는 게 몽골 정부의 구상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큰 나무에서 왼쪽으로 300m 가면 우리 집이에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인근 주민들은 이렇게 집 위치를 설명했다. 정확한 주소 체계가 없어 응급환자가 발생해도 구급차가 제때 도착하지 못하는 일이 잦았고, 행정서비스 사각지대도 컸다. 그러나 앞으로는 “몽골로 10”이라는 식으로 말하면 된다. 한국이 수출한 디지털 주소체계, ‘K주소’ 덕분이다.

K팝, K드라마, K푸드에 이어 ‘K주소’가 새로운 한류 콘텐츠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의 선진 행정 시스템을 세계에 전파하는 ‘행정 한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특히 K주소는 동아시아를 넘어 중앙아시아,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新실크로드' 구축의 핵심 동력이 되고 있다. 아울러 주소 기반 모빌리티 등 관련 산업 수출에도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가져올 전망이다.

지난해 9월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시내 한복판에 '서울로' 도로명 간판이 설치돼 있다.

지난해 9월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시내 한복판에 '서울로' 도로명 간판이 설치돼 있다.


주소 하나로 달라진 일상


세계의 주소 체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토지에 번호를 붙여 사용한 ‘지번 주소’, 둘째는 도로 이름과 건물 번호로 구성된 ‘도로명 주소’, 셋째는 위·경도를 기반으로 한 격자 좌표 방식의 ‘공간 주소’다.

과거 우리는 ‘지번 주소’를 사용했다. ‘종로구 관철동 45-1번지’처럼 표기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45-1번지’ 다음에 갑자기 ‘127번지’가 나타나는 등 번호가 뒤죽박죽이었다. 같은 지번에 여러 건물이 있어도 건물마다 다른 주소를 부여할 수 없었다. 이에 1910년대부터 100여 년간 사용해오던 지번 주소 체계를 2014년 도로명 주소로 전면 개편한 것이다.

도로 이름을 기준으로 건물마다 순차적으로 고유 번호를 부여한 도로명 주소는 지번 주소보다 더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위치를 안내할 수 있다. 그 결과 물류, 내비게이션은 물론 무인 드론·로봇 배송, 자율주행차 등 신산업 창출 및 주소기반 DNA(데이터·네트워크·인공지능)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게 됐다.


K주소의 몽골 수출 배경에는, 도로명 주소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해 현존 세계 최고 경쟁력의 주소체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핵심은 '사물주소' 개념의 도입이었다. 기존에는 건물에만 주소가 부여됐지만, K주소는 △버스정류장 △전기차 충전소 심지어 자동심장충격기(AED) 등 다양한 생활시설에도 고유 주소를 부여했다. 이에 따라 건물이 없는 공터에도 주소를 부여할 수 있었다. 도로나 건물이 없는 산악, 들판, 해안에도 '10m x 10m 격자'인 ‘국가지점번호’가 부여됐다. 주소를 3차원 입체 공간까지 확장해 대형 쇼핑몰 내부의 특정 매장 등도 정밀한 입체 주소로 안내할 수 있게 됐다. 촘촘한 주소망 구축으로 도로나 건물 없는 곳에서 응급상황이 발생해도, 곧바로 관련 인력이 출동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K주소의 우수성은 객관적으로도 입증됐다. 국제표준화기구(ISO)가 우수사례로 선정한 데 이어, 행정안전부는 2023년 주소활용지원센터를 개소해 한국국토정보공사(LX)에서 위탁 운영 중이다. 몽골, 우즈베크 등에 대한 주소체계 수출도 LX공사의 업무 확장 과정에서 실현됐다.

LX 한국국토정보공사 어명소(오른쪽) 사장과 몽골 토지행정청 엔크만라이 아난드 청장이 지난해 11월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공간정보 분야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에 서명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LX제공

LX 한국국토정보공사 어명소(오른쪽) 사장과 몽골 토지행정청 엔크만라이 아난드 청장이 지난해 11월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공간정보 분야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에 서명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LX제공


몽골 초원에서 싹튼 K주소


K주소의 해외 진출 1호 국가는 몽골이었다. 한반도 7배 크기인 몽골은 인구의 3분의 1이 이동식 게르(전통 천막)에서 지낸다. 말 그대로 “큰 나무에서 왼쪽으로 300m 가면 우리집” 같은 방식으로 위치를 설명했다. "한번 불이 나면 다 타야 꺼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몽골에서 화재나 응급 상황 대비가 제때 이뤄지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몽골 정부는 여러 선진국의 주소 시스템 도입을 검토했다. 유럽 시스템도, 영국의 격자 시스템도 시도해봤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리고 최종 선택한 것이 K주소였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도시와 농촌, 산악과 평원이 혼재된 복합 지형에 최적화된 시스템이다. 둘째, 유목민처럼 거주지가 자주 바뀌어도 적용할 수 있는 ‘공간 주소’ 개념이 있었다.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대한민국의 ‘노하우와 성공 경험’이었다. 우리도 2014년 지번 주소를 도로명 주소로 바꿀 때에는 적지 않은 혼란과 반발이 있었지만, 수년간의 설득과 홍보로 안착시킨 경험이 있었다. 엔크만라이 아난드 몽골 토지행정청장은 “한국은 도시와 자연이 혼재하는 몽골과 비슷하다”며 “계획도시 위주로 설계된 유럽의 주소 시스템보다 한국의 시스템이 우리에게 더 적합했다”고 설명했다.

LX공사는 주소 수출로 향후 4년(2026~2029년)간 몽골에서 110억 원 규모의 매출을 올릴 전망이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제공하는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을 통해서인데, 주소 체계 정착은 이미 몽골에 진출한 한국 유통업체의 경쟁력을 한층 높이는 후방 연계효과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한국에서 상용화한 주소체계를 토대로 전자상거래와 택배 산업의 활성화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도심 소공원의 사물주소. 한국일보 자료사진

도심 소공원의 사물주소. 한국일보 자료사진


중앙아시아를 넘어 아프리카로


몽골의 K주소 채택은 나비효과로 이어지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인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이 사실상 K주소를 채택한데 이어, 아프리카 지역 국가도 동참을 고려 중이다. 키르기스스탄의 경우 구소련 시절의 낡은 체계를 사용했는데, 최근 신도시 개발이 진행되면서 디지털 기술로 좌표를 쉽게 설정하고 찾을 수 있는 체계의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탄자니아도 K주소 기반의 주소 현대화 사업을 도입할 계획이다.


K주소 수출이 가져올 경제적 파급효과도 상당하다. 몽골이 발표한 투자 규모를 감안하면, 후속 채택이 유력한 우즈베크와 에티오피아 등에서 주소체계 수출만으로 상당한 수준의 매출이 기대된다. 바야흐로 몽골 초원의 게르에서 아프리카 사바나까지, 지구촌 곳곳에 한국형 주소체계가 자연스럽게 뿌리내리고 있다. 기술을 넘어서는, 진정한 의미의 소프트파워 한류라고 할 수 있다.

K주소 체계를 활용한 드론 배송 서비스를 점검하고 있다. LXTV 제공

K주소 체계를 활용한 드론 배송 서비스를 점검하고 있다. LXTV 제공


어명소 한국국토정보공사 사장

어명소 한국국토정보공사 사장


어명소 한국국토정보공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