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시즌 3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
※본 칼럼은 <오징어게임> 시즌 3에 대한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엄혹한 상황 앞에서 이병헌은 현실적인 타협을 주장한다. 그 반대편의 인물은 이상(理想)을 지키다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황동혁 감독이 연출했다. 어떤 작품일까. <오징어게임> 시즌 3(이하 <오겜 3>)? 땡, 틀렸다. 영화 <남한산성>이다. 농담이다. <오겜 3>와 <남한산성> 둘 다 맞다. <남한산성>에서 이병헌이 연기한 최명길은 청과의 화친으로 국가를 보전하고자 하고, 그 반대편에서 김상헌(김윤석)은 조선이 청에 종속되는 것을 우려하며 척화를 주장하다가 결국 삼전도의 굴욕 이후 자살을 선택한다(실제 역사에선 자살 미수에 그친다). <오겜 3>에서도 이병헌이 연기하는 프론트맨 황민호는 오징어게임의 설계자로서 은밀하면서도 노골적으로 주인공 성기훈(이정재)과 대립각을 세우고 그를 방해하고 조종하려 하며, 성기훈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며 존엄을 지켜낸다. 이병헌을 중심으로 포개지는 황동혁의 두 작품 간 흥미로운 우연은, 역시 흥미로울 뿐 그저 우연이다. 다만 이 구조적 유사성은 <오겜 3>, 좀 더 정확히는 지난해 12월 시즌 2에 이어 지난 6월 시즌 3로 분할되어 공개된 에피소드들이 어째서 실망스러운지에 대한 좋은 힌트가 되어준다.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프론트맨은 최명길이 아니다. 전자의 현실론은 후자에 비해 얄팍하고 편의적이다. 4년 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오징어게임>이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던 당시, 나는 이 지면에서 해당 작품을 비판적으로 다루며 추후 나올 새 시즌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병헌이란 거물급 배우를 캐스팅한 프론트맨의 과거와 그가 오징어게임의 지휘관이 된 이유도 궁금하지 않다. (중략) 자가당착에 빠진 중년 남성 악당의 사연을 우리가 또 들어줄 필요가 있을까.” 최종 에피소드를 다 보고 난 감상은 이 예측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시즌 2에 이어 <오겜 3> 서사의 한 축이 오징어게임 자체를 무너뜨리고 벗어나려는 성기훈의 신념이라면, 또 다른 한 축은 게임을 지휘하고 그 당위를 입증하려는 프론트맨의 인정투쟁이다. 첫 시즌에서 죽은 오일남(오영수)에 이어 시즌 2에서 프론트맨 역시 정체를 숨기고 오영일이라는 이름으로 게임에 참가해 성기훈을 관찰하고 자극한다. 첫 시즌과 달리 매 게임이 끝날 때마다 다수결로 게임 속행과 중지를 ○와 ×로 결정할 수 있는 시스템 속에서 기훈은 모두가 ×를 선택하도록 설득하지만 매 투표마다 좌절하고, 프론트맨은 적지 않은 참가자가 죽은 세 번째 게임 이후 기훈에게 ○를 택한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많이 희생됐어야 했다고 지나가듯 떠본다. 이 말은 얼핏 기훈 내면의 딜레마를 정확히 지적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두를 살리는 게 최선이라지만, 게임 속행을 택한 이들의 탐욕 때문에 이 학살극이 유지된다면 그들이 죽는 게 더 옳고 정의로운 것 아닌가?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건 그들이 아닌가? 이 제안은 사실 혹할 만한데, 안타고니스트로서의 프론트맨과 별개로 극 중 가장 밉상인 ‘빌런’은 사사건건 ○로 여론을 몰아가는 임정대(송영창)와 그 패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프론트맨이 우물에 푼 독이다. 임정대가 저열한 인간인 것과 별개로 이 부조리한 룰을 설계하고 강제하는 건 프론트맨 본인이기 때문이다. 민주적 투표를 참칭하지만 애초에 ○와 ×라는 선택지만이 강요되는 상황에서 선택이라는 개념 자체가 기만이다.
<오징어 게임> 시즌3에서 성기훈(이정재)이 핑크가드들에게 연행된 채 울부짖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
만약 <오겜 3>가 이러한 프론트맨의 기만에 대해, 또한 사람들이 겪는 다양한 부조리와 폭력을 개인적 선택의 책임으로 환원하는 ‘누칼협’의 세계관을 내면화한 동시대 시청자들이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서사적 전망을 남겼다면, 그나마 이 자극적인 피 칠갑의 끝에 유의미한 배움 하나는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즌 2 마지막에 기훈의 반란이 진압당해 그에게 동조했던 선량한 이들 상당수가 죽고 프론트맨이 게임에서 빠져 원래 자리로 돌아간 이후 <오겜 3>에서 가장 큰 서사적 반동을 이끄는 건 투표에서 완전히 주도권을 잡은 임정대 패거리의 폭주다. 가령 이번 오징어게임의 네 번째 게임이자 시즌 3의 첫 게임인 숨바꼭질은 직접적으로 목숨을 뺏는 살육전으로 설계되어, 투표에서 ○을 선택하는 것이 단순히 자신의 목숨만을 배팅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의 생명 역시 판돈으로 소모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동안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며 ○을 선택하던 이들이 진실과 본인 선택의 윤리적 무게를 대면하는 자기 인식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지만, 기훈을 지지하던 소수파를 제외한 대부분은 무의미하게 죽거나 죽이며 이 잔혹 게임에 순응하고 그 와중에 임정대는 용궁 선녀(채국희)의 뒤통수를 치고 살아남는다. 다음 게임도 비슷한 양상이다. 하여 이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내면의 인간성에 호소할 것이냐는 기훈의 문제의식은 서사에서 자연스레 뒤로 밀려나고, 이토록 악랄한 군상들 사이에서 선량한 기훈이 어떻게 생존할 것인지(또한 필연적으로 그들을 어떻게 탈락시킬 것인지)가 역시 자연스레 서사의 전면에 나선다. 즉 ○를 택한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많이 희생됐어야 했다던 프론트맨의 말에 기훈은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정작 작품은 그러한 방향으로 서사와 감정을 이끈다.
<오징어 게임> 시즌3의 주인공 성기훈(이정재). 넷플릭스 제공 |
어쩌면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척하며 우리를 특정한 선택으로 몰아넣는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적 알레고리가 될 수도 있었던 이야기는, 나쁜 선택을 서슴지 않는 악당과 옳은 선택을 하는 주인공의 뻔한 대립으로 전환된다. 정작 이 대립을 만든 프론트맨은 어딨는가. 슬슬 돈도 충분히 모았겠다 게임을 중지해볼까 하는 임정대 패거리에게 프론트맨은 마지막 게임은 참가자가 탈락자를 정할 수 있는 게임, 즉 다수파가 유리한 게임이란 걸 미리 제시해 게임 속행 여론을 이끌어내지만, 탐욕에 혹한 이들의 어리석음과 이기심이 강조될 뿐 프론트맨은 그저 인간 본성을 건드린 것처럼 그려진다. 여기서 앞서 인용한 <남한산성>의 구도는 기묘하게 역전된다. 애초에 공통의 적인 프론트맨이 청나라 역할이 되고 그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지닌 ○와 ×의 무리가 최명길과 김상헌처럼 대치하는 구도여야 하겠지만, 외려 <오겜 3>에선 시청자가 미워하는 ○의 무리가 청 역할이 되고 그들을 어떻게 다룰지 프론트맨의 현실론과 기훈의 이상론이 대립하는 구도가 만들어진다. 마지막 게임을 앞두고 프론트맨은 자신의 정체까지 드러내며 기훈에게 칼을 건넨 뒤 저 악랄한 참가자들이 잠든 동안 죽이는 게 기훈 본인과 게임 중 김준희(조유리)가 낳은 아기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 설득한다. 인간 본성과 인간사는 오징어게임처럼 잔인하며, 그 잔인함을 인정하고 더 독하게 굴어야 무익한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논리. 드라마는 회상 장면을 통해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참가자를 죽이는 길을 선택했던 프론트맨의 과거를 보여준다. 그도 도덕적 딜레마 앞에서 고민한 적 있다는 회상. 그런데, 그래서 어쩌란 건가. 이 회상은 끽해야 오징어게임을 보고 즐기는 VIP를 위해 게임을 더 자극적으로 설계하고 참가자들을 더 나쁜 선택으로 몰아넣는 부역자의 자기변명일 뿐이다.
프론트맨이 배우 특유의 카리스마와 작품 내 지위와 별개로 자신의 개똥철학을 증명하려 애쓰는 삼류 악당이라는 건 문제가 아니다. 그의 사상적 빈곤함 대비 비대한 자의식을 풍자하기는커녕 그가 지금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과거사를 연민 가득한 플래시백으로 비추고 기훈과 프론트맨의 대립을 사상 대 사상, 관점 대 관점의 대립처럼 다루는 <오겜 3>의 서사와 연출이 문제다. 게임의 마지막, 아기와 자신의 목숨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기훈이 스스로 몸을 던져 인간의 존엄을 증명한 장면이 적어도 이 구도 내에서 가능한 최선의 엔딩이었음에도 정작 <오겜 3>가 인류애와 수오지심에 대해 별다른 전망을 남기지 못하는 건 그래서다. 당장 마지막 게임에서 그려지는 기훈의 싸움은 부조리한 시스템에 대한 저항보다는 나쁜 참가자들로부터 죄 없는 아기를 지키는 것에 더 방점이 찍히거니와, 프론트맨의 비정한 현실론과 애초에 주인공인 기훈의 숭고한 자기희생이 극단적으로 대비될수록 그 사이에 존재하는 대충 어리석고 욕심 많지만 일말의 수치심과 이타심을 지닌 시시한 개인들이 어렵사리 발휘할 존엄의 가능성은 모색되지 못한다. 평면적인 임정대 무리로 대변되듯 <오겜 3>는 수백 명의 참가자와 시즌 1을 훨씬 상회하는 호화 출연진에도 불구하고 군상극으로서 더없이 밋밋하며, 그 공백을 채우는 프론트맨과 기훈의 대립은 시청자를 끊임없이 오직 하나의 질문으로 이끈다. 잔인한 현실 앞에서 개인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매몰될수록 이 잔인함을 필연적 현실로 구성하고 자연화하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체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렇게 시청자 앞에도 ○와 ×의 선택만이 남는다. 정확히는 ‘선택’이라는 환상이.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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