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읽은 우화다. 수사자와 암소는 뜨거운 사랑에 빠졌고 둘은 한 가정을 이루었다. 수사자는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매일 사냥을 해서 신선한 고기를 대접했다. 암소는 싫었지만 남편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꾸역꾸역 고기를 먹었다. 암소는 날마다 남편을 위해 신선한 건초를 준비해 대접했다. 사자는 건초를 먹는 게 고역이었지만 끝까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참을성은 곧 바닥을 드러냈고 서로 헤어지기로 했다. 그때 그들이 서로에게 한 말은 “나는 최선을 다했어”였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최선이 어리석은 최선이었다는 사실이다. 에리히 프롬은 진정한 사랑은 ‘지식’을 내포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지식은 특정한 정보를 뜻하지 않는다. 사랑에 내포된 지식은 자기 욕구를 상대에게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을 가리킨다. 그의 고통, 슬픔, 기쁨, 불안, 내밀한 상처를 알아채고 그것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 말이다.
어긋나는 말들이 세상을 횡행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어야 하는 언어가 오히려 사람들을 갈라놓는다.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고 하여 모두가 동일한 현실이나 사태를 떠올리지 않는다.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의 경험을 반영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에는 우리 삶의 경험이 스며들어 있다. 그렇기에 언어는 언제나 오해 혹은 오독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소통이 원활할 때 우리는 ‘말이 잘 통한다’며 기꺼워하고, 소통이 막힐 때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며 상대를 탓한다. 문제는 늘 타자에게 있다고 느낀다. 다른 이들의 말을 사정없이 조롱하거나 비판하는 이들이 많아서 세상이 시끄럽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라는 진술은 자신의 실패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일 때가 많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게으른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다. ‘확신’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주는 닻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우리의 사고 지평을 제한하는 덫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정상적’이라는 말은 다름을 배제하기 위해 사용될 때가 많다.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난 사고를 하는 이들은 일쑤 ‘비정상’으로 낙인찍힌다. 미셸 푸코는 정상성이란 다른 이들을 통제하고 규율하기 위해 권력이 만들어낸 기준이라고 말한다. 정상성이라는 담론 자체가 억압의 도구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어긋남도 사회가 부여한 질서와의 마찰에서 비롯된 언어의 운명일까?
어긋나는 말들이 세상을 횡행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어야 하는 언어가 오히려 사람들을 갈라놓는다.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고 하여 모두가 동일한 현실이나 사태를 떠올리지 않는다.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의 경험을 반영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에는 우리 삶의 경험이 스며들어 있다. 그렇기에 언어는 언제나 오해 혹은 오독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소통이 원활할 때 우리는 ‘말이 잘 통한다’며 기꺼워하고, 소통이 막힐 때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며 상대를 탓한다. 문제는 늘 타자에게 있다고 느낀다. 다른 이들의 말을 사정없이 조롱하거나 비판하는 이들이 많아서 세상이 시끄럽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라는 진술은 자신의 실패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일 때가 많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게으른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다. ‘확신’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주는 닻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우리의 사고 지평을 제한하는 덫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정상적’이라는 말은 다름을 배제하기 위해 사용될 때가 많다.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난 사고를 하는 이들은 일쑤 ‘비정상’으로 낙인찍힌다. 미셸 푸코는 정상성이란 다른 이들을 통제하고 규율하기 위해 권력이 만들어낸 기준이라고 말한다. 정상성이라는 담론 자체가 억압의 도구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어긋남도 사회가 부여한 질서와의 마찰에서 비롯된 언어의 운명일까?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이해하지 못한 단어들’ 장은 연인인 프란츠와 사비나가 사용하는 말의 어긋남을 몇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프란츠에게 삶의 핵심 가치는 ‘충실’이다. 그는 우리 삶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충실이라고 여긴다. 사비나에게 충실은 일종의 억압이다. 사비나를 들뜨게 하는 단어는 배반이다. 배반은 대열에서 이탈해 미지를 향해 떠나는 모험이기 때문이다. 프란츠에게 음악은 해방이다. 고독과 한적함과 책먼지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사비나는 음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음악으로 위장된 소음에 시달렸던 기억 때문이다. 확성기를 통해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노래는 소음에 불과하다.
이 둘 사이의 차이를 만든 것은 무엇일까? 살아온 내력이다. 프란츠는 자유로운 세계에서 살았고, 사비나는 전체주의적 광기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았던 것이다.
어긋남은 어쩔 수 없는 언어의 한계인가? 그렇지 않다. 둘 사이의 간극을 확인한 후에 등을 돌리고 마는 것은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게으른 태도이다. 각자가 사용하는 언어의 배후에 있는 삶의 결, 감정의 무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의 자리에 서보려는 노력이야말로 인간다운 태도이다. 정진규 시인은 옹알이하는 아기를 바라보며 옹알이는 ‘의미도 무의미도 다 통한다’고 노래했다. 명료한 언어로 분절되지 않은 옹알이가 다 통할 수 있는 것은 아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사랑의 자발성 때문이다. 말의 어긋남을 관계 단절의 신호로 받아들이지 않는 여백이 필요하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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