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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후진국형 산업재해…법 집행 단호해야 [왜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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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후진국형 산업재해…법 집행 단호해야 [왜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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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 당국이 지난 7일 오전 인천 굴포하수종말처리장에서 맨홀 사고 실종자 수색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소방 당국이 지난 7일 오전 인천 굴포하수종말처리장에서 맨홀 사고 실종자 수색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록호 | 연세대 객원교수·전 WHO 표준국장·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지난 5일 이재명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산업재해 문제를 언급하며 “입법 대책을 포함해 총괄적으로 정리해 보고하라”고 지시한 바로 다음날 인천에서 맨홀 작업을 하던 노동자 두명이 숨지거나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생명과 노동의 존엄성, 국가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만나고 있다. 과연 국민주권정부는 ‘누구나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데 성공할 것인가? 산업재해는 우연한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생명존중과 공동체적 연대의 수준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긴 노동시간과 가장 높은 산업재해 사망률을 동시에 가진 한국은 산업재해에 관한 한 후진국이다. 하루 평균 6명의 노동자가 사고나 직업병으로 목숨을 잃고 그들의 이름은 가끔 뉴스의 한 줄로 지나가고 연말통계에 숫자로 잡힌다.



김훈 소설가가 말한 것처럼 “산업재해 문제는 인간의 문제”다. 유가족의 삶은 돌이킬 수 없고 생계가 어려워지며 남겨진 아이들은 어머니나 아버지 없이 성장하고, 일하러 가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자식을 그 부모는 가슴에 묻고 산다. 예방 가능한 사고나 직업병으로 죽는 노동자는 윤리적인 관점에서 사회적 살인의 희생자라고 볼 수도 있다.



사람의 생명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은 부당하지만, 산업재해로 인한 직간접적 손실은 전세계 국내총생산(GDP)의 4%에 이른다. 안전보건에 투자하는 비용의 최대 4.8배 편익이 발생한다는 분석도 있다. 산업재해를 줄이면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만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생산성과 국가의 경제성장에도 도움이 된다. 즉 생명과 경제 모두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사후 대응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많은 선진국들은 오래 전부터 리스크의 완전 제거를 추구하는 ‘비전 제로’를 표방하며 사전 예방 원칙에 근거한 엄격한 규제를 도입했다. 유럽의 고용주들에게 안전보건에 투자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법이 있기 때문”이라는 응답이 85%로 압도적이었다. 법의 단호한 집행이 유럽 노동 안전보건의 성공요인인 셈이다.



정부의 규제는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다. 안전보건을 위한 강력한 규제는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공정한 산업 생태계를 지키는 기초가 된다. 안전보건에 투자하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손실처럼 보이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노동자와 기업과 국가에 모두 편익을 가져다준다. 일터의 안전보건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보장되는 북유럽 나라들은 국내총생산과 행복지수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산업재해 문제는 장시간 노동 문제와 함께 국민주권정부가 풀어야 할 난제 중 난제다. 관계부처 모두가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 실질적인 변화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려면 정부가 가진 역량과 자원을 총동원해야 할 것이다. 이해당사자인 노동자와 기업이 입법과 정책개발 실행 과정에 적극 참여하느냐, 아니면 소외되느냐가 실질적인 변화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다.



그리고 잊지 말자. 오늘도 누군가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출근을 한다.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보장하는 선진국의 시민이 되려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죽음을 익숙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산업재해를 추방하는 법과 제도를 만드는 일은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앞으로 어떤 나라에 살고 싶은가를 선택하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이 그 선택을 위해 참여하고 행동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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