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드라의 머리를 치는 헤라클레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은 젊은 날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으로 방탕한 삶을 살았다. 호화로운 집에서 하인들의 시중을 받았고, 외출할 때면 여섯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다녔다. 수녀가 된 누이는 환락에 젖은 오빠를 걱정하며 기도했다. 서른한살이 되던 1654년 11월 재앙이 닥쳤다. 파스칼이 탄 마차가 센강 다리를 이탈했다. 말들은 강에 떨어졌지만, 마차가 난간에 걸려 마차 주인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충격을 받은 파스칼은 2주 동안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11월23일 밤 영혼이 불같이 타오르는 신비체험이 파스칼을 휩쓸었다. 파스칼은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어린 파스칼은 수학 신동이었다. 열두살 때 혼자서 유클리드 기하학의 원리를 깨우쳐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임을 증명했다. 열아홉살 때는 세무 감독관이던 아버지의 일을 도우려고 기계식 계산기를 만들었다. 컴퓨터의 원형이라고 할 만한 발명품이었다. 공기의 압력이 높이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고 그 원리에 기초해 기압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불의 밤’ 신비체험 이후 파스칼은 수학의 세계에서 멀어졌고,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신과 인간을 사유했다. 그 사유의 모음이 파스칼 사후에 ‘팡세’라는 이름으로 묶여 나왔다.
파스칼이 반복해서 생각한 것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비참함과 위대함이었다. 그 생각 속에서 파스칼의 저 유명한 문장이 솟아 나왔다. “인간은 가장 연약한 갈대다. 하지만 그 갈대는 생각하는 갈대다. 갈대를 부러뜨리려고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한 방울의 수증기, 한 방울의 물만으로도 인간을 죽이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인간을 부러뜨린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우주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 왜 더 고귀한가? 인간에게는 생각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생각 가운데 있다.”
파스칼은 그 ‘생각하는 인간 정신’을 ‘기하학적 정신’과 ‘섬세한 정신’으로 나누었다. 기하학적 정신은 원리에서부터 논리적으로 사유를 전개해 결론을 이끌어내는 정신이다. 모든 것을 단순한 것으로 환원해 분석하고 추론하는 과학과 수학의 정신이 파스칼이 말하는 기하학적 정신이다. 반면에 섬세한 정신은 추상적 사고로는 잡히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정신이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은 수학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느낌들이 모여 삶을 이룬다. 직관을 통해 한눈에 마음을 통찰하는 정신이 섬세한 정신이다.
파스칼은 한 사람 안에 두 정신이 함께 깃들 수 있음을 인정한다. “관찰력이 좋은 기하학자는 누구나 섬세한 정신의 소유자가 될 수 있고, 섬세한 정신의 소유자는 낯선 원리들로 관심을 돌릴 수만 있다면 누구나 기하학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두 정신을 다 갖추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기하학 문제는 답이 정해져 있어 추론이 잘못됐을 경우 그 오류를 정확히 찾아낼 수 있지만, 삶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아서 설령 답을 찾아냈더라도 그 답이 정답이라는 보장이 없다. 바로 그런 이유로 기하학적 정신은 섬세한 정신을 불신한다. 반대로 섬세한 정신은 기하학적 정신을 낮추어 본다. 기하학적 정신은 삶의 풍부함과 복잡함을 감당하지 못한다. ‘팡세’를 써가던 때의 파스칼, 기하학의 시절을 지나 신비의 밤을 겪은 파스칼은 섬세한 정신의 편에 서 있다. 삶은 수학 머리로 푸는 방정식이 아니다.
파스칼이 말하는 두 정신은 세상을 보는 두가지 태도라고도 할 수 있다. 기하학적 정신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섬세한 정신이 보는 세상과 다를 수밖에 없다. 세상을 보는 눈은 세상을 인식하는 눈이다. 파스칼식 이분법은 다른 사람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극과 역사를 나란히 놓고 사유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시인의 작업’과 ‘역사가의 작업’을 대비한다.
“역사가와 시인의 차이는 운율에 맞춰 쓰느냐 운율 없이 쓰느냐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차이는 역사가는 ‘일어난 일’을 말하고 시인은 ‘일어날 것 같은 일’을 말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시는 역사 서술보다 더 철학적이며 더 위대하다.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고 역사 서술은 개별적인 것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태도는 분명하다. 시 곧 비극은 역사보다 위대하다. 왜 비극이 역사보다 위대한가? 비극은 ‘일어날 것 같은 일’ 곧 개연성 있는 허구를 통해 보편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역사는 ‘일어난 일’ 곧 개별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을 서술할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목하는 것은 비극이 인간 삶을 해석하는 논리적 구조를 지녔다는 사실이다. 비극에는 삶의 법칙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구현한 비극 작품은 개별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을 나열하는 역사 서술보다 위대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이론주의자의 태도로 말하고 있다. 같은 정신의 작업이라고 하더라도, 이론화할 수 있는 작업이 이론화할 수 없는 작업보다 우월하다는 이야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주의 정신은 파스칼이 말하는 기하학적 정신에 가깝다. 비극은 인간 삶의 논리적 구조를 드러내기에, 일어난 일의 서술에 그치는 역사보다 위대하다. 그러나 역사를 낮추어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견해를 역사가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조금 먼저 살았던 투키디데스의 발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대한 정면 반박을 발견할 수 있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27년 전쟁을 그린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서문에 자신의 역사 기록 작업에 대해 간명한 평가를 밝혀놓았다.
“내가 기술한 역사에는 이야기가 없어서 듣기에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사에 관해,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사에 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 역사 기술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며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면서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저작이 ‘대중의 취미에 영합해 일회용 읽을거리로 쓴 것이 아니라 영구히 보관해 두고 읽어야 할 장서용으로 쓴 것’이라고 사뭇 자랑스럽게 말한다.
여기서 투키디데스는 역사 서술이 비극 창작보다 덜 위대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마치 미리 읽어본 것처럼 논박하고 있다. 투키디데스가 보기에 역사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유사한 방식으로 되풀이된다. 과거는 과거로 끝나지 않는다. 과거사는 미래사다. 그러기에 이미 일어난 일을 잘 이해하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역사를 공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책이 그런 역할을 하리라고 자부한다. 비극 작품이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 개별적 삶의 보편성을 그리듯이, 역사 서술은 개별적인 역사적 사건을 통해 집단적 삶의 보편성을 그린다.
투키디데스가 주목한 것은 반복되는 역사의 패턴이다. 하지만 역사 서술의 기능이 이런 패턴을 드러내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 알려주는 가장 분명한 사실은 선행의 집단적 경험이 후행의 집단적 행위를 규정하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과거의 경험을 간단히 건너뛸 수 없다. 인간의 집단적 경험이 만든 집단적 의식은 일종의 구조로 굳어져 있어서 그것을 뜯어고치는 데는 그 구조가 들어서는 데 투입된 힘만큼의 힘이 필요하다. 역사가 형성한 집단적 의식은 개별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다. 집단적 의식 구조가 버티는 한, 개별 인간의 사고방식도 무너지지 않고 버틴다. 사고에도 관성이 있어서 웬만한 힘이 아니고서는 관성을 이겨낼 수 없다. 역사의 진전은 그 관성과 싸워나가는 일이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한 대목에서 지나가듯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싫은 것은 냉정한 논리로 거부하지만, 바라는 것은 막연한 희망으로 포장한다.” 막연한 희망만으로는 역사를 올바르게 만들어갈 수 없음을 지난 40년의 우리 현대사가 보여준다. 이른바 ‘보수세력’의 집권은 부패와 무능으로 번번이 비참하게 끝났다. 집권자가 감옥에 가거나 환란을 불러오거나 탄핵당했다. 그런데도 그 세력은 히드라의 머리처럼 잘리고 나서도 또다시 머리를 내밀었다. 히드라의 머리를 만들어내는 몸통이 해체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히드라 머리는 계속 나올 것이다. 몸통 해체의 시작은 검찰 개혁이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썩은 검찰이 히드라의 심장이다. 심장이 피를 대주는 한, 머리는 다시 자라고 역사의 고통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고명섭 | 언론인.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생각의 요새’, ‘광기와 천재-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kallipolis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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