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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이코노미스트] 美日 관계 변화와 한국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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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이코노미스트] 美日 관계 변화와 한국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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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미국 군사력에 의한 보호를 받는 대신 군비 지출을 최소화하고 경제 재건에만 집중한다는 소위 '요시다 독트린'을 채택했다. 이는 일본이 공격을 받으면 미국이 지켜주지만, 미국이 공격을 받아도 일본은 도울 의무가 없다는 비대칭적 동맹관계를 내포한다. 당시 일본의 재무장을 경계하는 미국과 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는 일본 입장이 모두 반영된 결과였다.

그러나 비대칭적 동맹관계는 냉전시대 일본의 비약적인 경제 발전과 미국의 쌍둥이 적자(재정적자와 무역수지 적자)가 교차하면서 갈등의 씨앗이 됐다. 패전국이었던 서독과 일본은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한 반면, 정작 미국은 쌍둥이 적자에 시달린다는 지적이 대두됐다. 1985년 주요 선진국 재무장관들이 모여 각국 통화 가치를, 특히 서독 마르크화와 일본 엔화 가치를 미국과 공동 관리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마르크화 절상 합의는 독일 통일 등 더 굵직한 사건들에 덮여 별다른 위력 없이 소멸됐지만, 엔화 절상 합의는 지금까지도 일본 경제를 '잃어버린 30년'으로 몰아넣은 주범으로 지목된다. 그리고 플라자합의와 잃어버린 30년은 일본 사회에 비대칭적 동맹관계가 일본에 더 이상 도움이 되는지 회의를 던졌다. 이후 일본에서는 군대를 양성하고 동맹국이 공격받으면 함께 반격하는 정상 국가가 되자는 '정상국가론'이 점차 요시다 독트린을 대체했고, 전쟁 책임론은 희미해져 갔다.

최근 미국에 대한 불공정거래 관행 등을 이유로 미국은 교역국들에 관세 협상을 요구했다. 관세 협상이라고 부르지만, 실제 협상 범위는 무역뿐 아니라 환율, 군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오히려 미국은 무역보다는 다른 더 큰 무언가를 바꾸고자 한다.

플라자합의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던 일본은 협상 초기부터 아카자와 료세이 협상단 대표와 가토 가쓰노부 재무상의 동선을 분리함으로써 환율이 협상 의제가 되는 것을 차단했으나, 방위비 문제를 두고 미국과 정면 충돌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계기로 나토 회원국들이 국방 예산을 국내총생산(GDP)의 5%까지 증액하되 3.5%는 무기 구매 등에 사용하기로 합의했고, 미국은 북한과 중국의 위협을 이유로 한국과 일본의 동참을 촉구했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나토 정상회의에 불참하고, 예정됐던 미·일 외무·국방장관 회담도 취소하는 등 일본은 강하게 반발했다. 방위만 미국에 일임했을 뿐, 일본은 엄연한 자주국가이고 나토 회원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주일미군 주둔비용 분담 문제를 넘어 방위 예산 배정과 사용까지 개입하는 것은 주권에 대한 침해라는 입장이다. 미국은 여태껏 일방적으로 지켜줬는데, 다른 동맹국들만큼의 역할도 못하냐고 힐난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이 '스포일드(spoiled·오냐오냐 들어주니 권리인 줄 안다)'됐다고 비난했고,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방일 계획을 취소함으로써 양국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외견상 미·일 양국이 방위 예산을 두고 충돌했지만, 사실 양국 정치 지도자들은 일본의 정상 국가화라는 대전제에는 동의한다. 참의원 선거 후 아베 신조 전 총리 시절 일본 스스로 방위 예산을 증액했던 것과 비슷한 형태로 물밑 협상이 이뤄지고, 양국 간 관세 협상이 타결될 듯하다. 그러나 일본의 정상 국가화, 재무장은 우리에게 심각한 우려를 갖게 한다. 일본의 재무장은 북한과 중국을 자극해 동아시아의 안보 불안을 증폭시킬 것이다. 미·일과 중국 간 갈등 속에서 우리는 어느 쪽인지 끊임없는 선택과 검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심승규 아오야마가쿠인대 국제정치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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