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은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유리가 아니라, 금속으로 만든 거울이다.
고대의 거울은 청동, 즉 동경(銅鏡)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전시에서는 다양한 재질과 형태, 무늬가 돋보이는 거울을 폭넓게 다룬다.
손에 들고 다니기 편하도록 제작된 다양한 형태의 거울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거울은 시대와 지역을 아우른다.
과거 금속으로 거울을 만드는 일, 거기다 빛을 담는 것조차 쉽지 않았으리라.
구리와 주석을 녹여 만든 거울은 특별한 사람만 가질 수 있고 흙이나 돌, 납으로 비슷한 모양의 물건을 만들어 의례에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 거울이 시대가 지나 우리는 손쉽게 볼 수 있다.
생활 곳곳에서 모양도 다양하게 쓰인다.
아침 외출준비로 분주하다.
화장하려고 거울 앞에 앉으니 어느새 흰머리 늘어나는 중년 아줌마가 있다.
청주박물관에서 '거울, 시대를 비추다' 전시를 보고 나니 눈앞에 거울이 다르게 보인다.
과연 얼굴이 비칠까 싶은 고대의 거울보다 아주 선명하게 보여준다.
거울 앞에 선 나는 팔자 주름에 아직도 마르지 않은 어제의 피로.
거울 저 너머로 겹쳐 보이는 또 다른 내가 있다.
나를 포장하기 위해서 나를 대신해 웃어주고 고개 숙이며 불편한 감정을 감출 것이다.
칼 융이 말한 '페르소나'처럼 집단속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 자신을 감춘다.
거울은 자화상이다.
단순한 자기 묘사를 넘어 내면을 파고드는 깊은 사색을 담고 있다.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할 수 있다.
자기 외모를 얼마나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 나를 보듯이 삼인칭 시점으로 보는 때가 얼마나 될까.
거울 앞에서 나를 볼 때는 한 모습이지만, 타인이 나를 볼 때는 옆모습, 뒷모습 등 내가 보는 모습과 다른 모습들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판단은 주관에서 벗어날 수 없어 오류를 범하기 쉽다.
선입견이나 편견이 개입될 수 있다.
객관적인 판단에 준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통해 나를 보아야 한다.
거울로 본 내 모습이 진짜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와보니 정반대였다.
내가 알던 진실과 다르다.
이제껏 살아온 나의 진실은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
거울 속의 나는 정반대다.
내가 왼손을 내밀 때, 거울에서 보면 오른손이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평소 말이 없던 지인이 말한다.
"모임득이 말이야.
젊었을 적에는 지금처럼 둥글넓적하지 않았단 말이야", "날씬하고 예뻤단 말이야".
젊고 예뻤던 내가 애면글면 살아가는 것이 안쓰러웠나 보다.
그 지인 딸도 젊은 나이에 남편이 갔다.
그러니 더 측은하게 바라보다가 술의 힘을 빌려 얘기했으리라.
딸이 어렸을 적에 인상을 쓰며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을 해도 힘들고 힘에 부치던 시절.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니, 내가 날마다 인상 쓰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었다.
아이를 생각해서 억지로라도 웃는 연습을 했었다.
자식만 한 거울이 또 있을까.
제일 힘들고 무서운 거울이다.
자식의 행동을 반사하며 살아간다.
유리거울이다.
하늘로 간 지 오래된 그에게 내가 웃었을까? 말기 암으로 고통받는 그를 간호하며 명암저수지에 가서 울 때마다, 진실을 반사하지 않는 거울 같다.
붙들고 펑펑 울어야 했는데 초등학생인 아이들한테 울음 보이면 안 될까 봐 씩씩하게 다녔더니 그게 싫었나 보다.
그럴 때 내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이제껏 화장할 때, 작은 손거울에 나를 비춰왔다면 이제는 전신 거울로 비춰 볼 시간이다.
나를 더 잘 보다 보면 온전한 내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싶어서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할까.
삶은 하나의 거울, 우리의 존재와 행동을 비춰준다.
세상을 비춰주는 가장 결정적이며 아름다운 거울이다.
이제는 '페르소나'처럼 나를 감추는 가면을 쓰지 않으리라.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면 최상의 것이 내게 돌아온다.
인생 거울이다.
모임득 수필가 거울시대를비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