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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칼럼] ‘국가 간의 관계이자 통합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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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칼럼] ‘국가 간의 관계이자 통합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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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재명 대통령과 국무위원이 6월 25일 국무회의에 앞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6·25전쟁 발발 75주년을 맞아 이 대통령은 “경제가 안정되고 국민이 안심하며 안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한반도 평화 체계를 굳건히 구축해 나가겠다”라고 다짐했다. 출처: 대통령실

사진: 이재명 대통령과 국무위원이 6월 25일 국무회의에 앞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6·25전쟁 발발 75주년을 맞아 이 대통령은 “경제가 안정되고 국민이 안심하며 안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한반도 평화 체계를 굳건히 구축해 나가겠다”라고 다짐했다. 출처: 대통령실



“남과 북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나라와 나라의 관계이자 통합을 지향하는 특수관계이다.”



첫 문장은 1991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의 전문에 담긴 것으로 남북관계를 ‘통일지향적인 특수관계’로 규정한 것이다. 그 다음 문장은 우리 사회와 정치권에서 공감대를 형성해가면서 조선(북한)과 대화를 통해 합의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필자가 써본 것이다. 이 둘을 비교해보면 두 가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공식 국호를 사용하면서 남북관계의 현 상태를 보편적인 의미의 국가 간 관계로 규정한 것이고, 둘째는 특수관계인 점을 강조하면서도 ‘통일’ 대신에 ‘통합’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여기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을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한국과 조선은 기본합의서 체결 3개월 전에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하지만 기본합의서에선 이러한 ‘보편성’을 부정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정작 통일의 전망은 가장 어두워지고 있다. 이는 비단 조선이 통일을 포기하고 ‘적대적 두 국가론’을 들고 나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본합의서 체결 이후 한국의 대북·통일정책은 정권에 따라 그 진폭이 너무나 컸고 통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기본합의서와 쌍두마차를 이룬 것이 바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었는데, 조선은 사실상 핵보유국이 된 상태이다. 남북 대화와 교류협력도 ‘제로’ 상태에 빠진 지 이미 오래이다. 이 사이에 한국은 조선을 제외한 모든 유엔 회원국과 수교를 맺었고 조선도 157개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은 사라지고 한국과 조선이 각기 보편성을 추구해온 셈이다.



이렇듯 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을 두 축으로 삼았던 ‘1991년 체제’는 종언을 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나는 핵문제 해결을 포기해선 안 된다며 군비통제를 거쳐 비핵무기지대(비핵지대)를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해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와 더불어 남북관계를 ‘국가 간의 관계이자 통합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로 만들어가자는 제안을 내놓는다. 이는 이미 존재하는 보편성을 인정하면서 사라진 특수성을 되살리자는 취지를 품고 있다.



또 ‘통일’이 아니라 ‘통합’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경직성에서 유연성으로의 전환이다. 저쪽이 통일하기 싫다는데 이쪽에서 자꾸 통일을 말하면 남북관계의 적대성을 해결하긴 어려워진다.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다. 남북관계의 미래는 다양하게 설계할 수 있는데, 정작 ‘통일’이 상상력과 유연성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통합은 한국-조선 수교와 사회·문화·경제 교류협력에서부터 경제통합을 거쳐 유럽연합식의 국가연합과 궁극적으로는 통일까지도 아우르는 개념이다. 이는 또 하나의 취지로 연결된다. 통합이라는 그릇에는 통일도 담을 수 있기에 헌법 정신에도 부합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방향으로 남북관계를 재설정해 나아가는 것이 실용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지정학적 격변의 시대에 우리의 전략적 자율성을 높여줄 것이라고 본다. 실용적인 이유는 다른 선택들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통일지향적인 특수관계’를 고수하면 꽉 막힌 남북관계를 풀기 어렵기에 우리의 이익과 비전에 반한다. 그렇다고 조선처럼 통일을 포기하고 두 국가를 공식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헌법을 개정하지 않는 한, 위헌 논란을 야기하면서 엄청난 내부 갈등을 수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필자의 제안은 조선에겐 수용성을, 국내에선 공감대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



미래지향적인 이유도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선 남북대화를 재개하는 데에 유용한 선택이 될 수 있다. ‘서로가 국가성을 존중하면서 우호적이고 평화적인 남북관계를 설계하자’는 메시지는 조선의 대남 노선에 재고의 여지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나는 이재명 정부가 내부적으로 이러한 방향으로 준비를 하면서 대북 특사 파견과 북미회담 재개를 위한 여건 조성이 나서기를 바란다. 여건 조성의 핵심은 한미 정상간의 긴밀한 소통을 통해 8월 대규모 한미연합훈련을 유예하고 8·15 경축사에서 새로운 대북정책과 남북관계의 비전을 발표하는 것이다.



8월 연합훈련 유예가 얼마나 중차대한 선택이 될지는 6년 전 여름에 있었던 일을 복기해보면 알 수 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연합훈련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한미가 훈련을 강행하면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바 있다. 특히 조선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삶은 소대가리 양천대소할 노릇”이라며, “남조선과는 더 이상 상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그렇게 된 바 있다. 이재명 정부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또 조선이 2기 트럼프 행정부의 잇따른 러브콜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데에는 한미·한미일 연합훈련이 계속 실시되고 있는 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재명 정부 시기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의 풍향계가 대규모 연합훈련 실시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뜻이다.



‘국가 간 관계와 통합지향적인 특수관계’에 기초한 남북관계 새판짜기는 급변하는 지정학적 환경에서 한국이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펼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먼저 ‘발등의 불’이라고 할 수 있는 국방비 문제부터 살펴보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에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방위비 5%’ 합의를 이끌어낸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에도 유사한 요구를 하고 있다. 올해 한국의 국방비는 약 61조원으로 GDP 대비로는 2.3%를 약간 넘는다. 그런데 이를 미국의 요구대로 2035년까지 GDP 대비 5%로 올리면 그해에는 국방비가 165조원에 이르게 된다. 이는 연평균 GDP 성장률을 2%로 가정한 것으로, 10년간 국방비 총액도 1120조원이 된다. 그런데 한반도 정세가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나 악화되면 미국의 무리한 요구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가 어려워진다. 이에 반해 남북·북미대화 재개를 통해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가 안정화될수록 국방비를 적절하게 책정할 수 있는 자율성이 커질 수 있다.



남북관계 새판짜기는 대만 문제를 둘러싸고 갈수록 치열해지는 미중 간의 갈등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바이든 행정부에 이어 트럼프 행정부 역시 중국의 대만 침공 억제를 핵심 전략으로 내세우면서 동맹국을 규합하려고 한다. 앞서 언급한 국방비 대폭 인상 요구도 이와 맞닿아 있다. 또 미국은 ‘대북 억제 중심’에서 ‘대중 억제 중심’으로 주한미군의 역할 변경도 추진하고 있다. 만약 한국이 이러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쪽으로 움직이면, 한중관계 개선도 물거품이 될 공산이 커진다. 무엇보다도 대만 해협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하면 원하지 않는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남북관계 안정과 소통·대화 재개는 그래서 절박하다. 한국과 조선은 각기 미국과 중국의 동맹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만 사태가 발생하면, 남북관계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는 한반도 전체의 운명이 달린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관계 새판짜기는 북미관계에 큰 변동이 일어날 경우에도 효과적인 대처를 가능케 한다. 이재명 정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바람대로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면, 북핵 동결·감축을 포함한 군비통제와 대북 제재 완화는 물론이고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 외교관계 수립 등 근본 문제가 논의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6월 27일에도 “북한과 갈등을 해결할 것”이라고 밝힌 것에서도 이러한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돼 상기한 문제들이 논의·합의되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남북관계가 ‘국가 간의 관계’도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도 아니면, 한국이 ‘패싱’당할 우려가 커진다. 제재가 완화되어도 남북 교류와 협력은 재개되지 않고, 한국이 빠진 상태에서 북미평화협정과 북미수교가 논의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남북관계가 국가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재편될수록, 우리는 북미관계 변동이 품고 있는 기회를 극대화할 수 있다. 재래식 군사력과 핵문제를 아우르는 군비통제 협상을 남북미 중심으로 짤 수 있고, 북미 간에 평화협정 논의가 시작될 경우 당사자 논란을 방지하면서 남북미중 협상 구도를 마련할 수 있으며, 대북 제재가 완화될 경우 경제협력 재개에도 유리한 환경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지금까지 한 번도 검토된 바 없는, 그러나 남북관계 새판짜기에 가장 유용한 방식이 될 수 있는 ‘한국-조선 수교’도 추진해볼 수 있다. 한조 수교는 통합으로 가는 과정이기에 헌법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또 대개 수교를 관계 개선의 결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으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국가 간에 먼저 수교를 맺고 연락사무소, 대표부, 대사관 등 나중에 외교관계를 발전시키는 사례도 많기 때문이다. 또 수교를 맺고서도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을 미루고 제3국 대사가 겸임하는 방식도 더러 있다. 한국은 작년 2월 쿠바와 수교를 맺었는데, 한국이 쿠바에, 쿠바가 한국에 대사관을 개설한 시점은 각각 11개월과 16개월 후였다. 이 사이에는 주멕시코 한국대사와 주중국 쿠바대사가 겸임을 했었다. 또 한국은 올해 4월에 시리아와 수교했는데, 아직까진 연락사무소나 대사관을 설치하지는 않은 상태이다. 이러한 사례는 한국과 조선이 관계 개선의 의지를 담아 먼저 수교를 맺는 것이 파격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정리하자면, 이재명 정부의 새로운 대북정책은 남북관계 새판짜기를 목표로 삼는 것이 ‘국익 중심의 실용주의’에도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때마침 통일부 명칭 변경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와 있다. 나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이자 통합(통일)지향적인 특수관계’라는 취지에 가장 맞는 명칭이 ‘남북관계부’라고 본다. 어떠한 이름이든 통일부 개칭을 시작으로 한미 정상의 8월 한미연합훈련 유예 선언을 거쳐 새로운 대북정책을 담은 이 대통령의 8·15 경축사로 이어지길 바란다.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장 겸 평화네트워크 대표 wooksi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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