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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변덕쟁이 ‘글로벌 아빠’ [세계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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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변덕쟁이 ‘글로벌 아빠’ [세계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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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 이후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헤이그/신화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 이후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헤이그/신화 연합뉴스




슬라보이 지제크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지난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정상회의에서 미국의 제안에 따라 막대한 국방비 증액에 합의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도널드 트럼프와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의 브로맨스가 주목을 받았다. 트럼프가 이스라엘과 이란을 “학교 운동장에서 싸우는 두 아이”로 비유하자, 뤼터가 웃으며 “그럼 아빠가 나서서 강한 말로 그들을 멈춰야죠”라고 맞장구친 것이다.



뤼터는 자신을 포함한 유럽연합(EU)의 주요 인물들도 아버지에게 엉덩이를 맞는 아이라는 점을 잊어버린 것 같다. 유럽 국가들 역시 아빠의 엄한 꾸지람을 듣고서 국방비 지출을 5%로 올린 것 아니었던가. 안타깝게도 이 증액은 유럽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대신 오히려 유럽을 미국의 지배에 더 종속시킨다. 트럼프는 이처럼 세계 무대에서 자신의 새로운 역할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보상과 강압적 힘을 섞어 가며 평화를 지키는 ‘글로벌 대디’의 역할이다. 그는 보편적인 외교 규칙이나 최소한의 품위조차 따르지 않는 변덕스러운 아빠로, 언제나 실용주의적 현실주의의 이름으로 행동한다. 이 사태에서 진정으로 수치스러운 존재는 트럼프가 아니라, 뤼터 같은 이들, 즉 엄한 아빠의 통제를 기다리는 말썽꾸러기 아이가 되기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대화의 동등한 파트너로서 원칙적인 정책을 옹호하는 지도자의 위치를 스스로 포기하는 우리 모두다. 트럼프가 백악관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를 굴욕적으로 대했던 방식을 떠올려보라. 트럼프가 ‘쿨한 아빠’로서 젤렌스키에게 평화를 원하지 않느냐고 꾸짖자, 젤렌스키는 즉시 아빠의 권위에 굴복하며 트럼프와 미국에 대한 사랑을 선언했다.



아빠로서의 트럼프는 노골적으로 한 아이를 다른 아이보다 편애하고(테헤란을 재로 만들겠다고 위협했다), 경제적 결정을 주관적인 호불호에 따라 내리기도 한다(영국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영국에 대한 관세를 낮췄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 휴전을 강제하는 과정에서 상대가 체면을 세울 수 있도록 허용하는 유연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이란이 카타르의 미군 군사기지를 폭격하겠다는 사전 정보를 미국에 제공하여 미국이 병력을 철수해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게 할 수 있도록 해준 일에 대해 감사의 뜻을 밝혔다. 트럼프는 무조건 항복을 말하면서도, 이란에 마지막 체면을 세울 공격 한번은 허용한 것이다.



트럼프가 분쟁을 시작하려는 것이 아니라 끝내기를 원한다는 것은 일정 부분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앞으로 더 많은 “승리들”을 거둔다 하더라도, 그가 쿨한 아빠로서 세계 평화를 조율하려는 시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상대방이 그의 아빠 역할 자체를 거부해버리면 더 이상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가자지구에 평화를 가져오겠다고 약속하지만, 이스라엘을 만족시키면서 팔레스타인에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블라디미르 푸틴 같은 상대와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더 강력한 압박이나 개입 철회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 물론 진정한 경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트럼프의 실용주의적 평화 중재자로서의 입장이 거짓이라는 데 있다. 그는 비즈니스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가 따르는 협상의 조건은 이미 정치적 결정과 배제에 의해 철저히 규정되어 있다. 이란과의 사례처럼, 그의 ‘실용적 협상’이란 결국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하는 방식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다.



글로벌 차원의 쿨한 아빠로서의 트럼프는 명확한 규칙도, 윤리적 원칙도 없는 세계를 예고한다. 그 세계에서는 폭력적인 교환에 휘말린 아이들을 통제하겠다고 나선 행위자 자신이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권위로 작동한다. 요컨대, 우리 세계는 가장 중증의 광인이 통제권을 장악하고 의사 행세를 하는 정신병원에 가까워지고 있다.



번역 김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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