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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의 시선' 의식하는 한국인, 1988년 서울올림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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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의 시선' 의식하는 한국인, 1988년 서울올림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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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박해남, '1988 서울, 극장도시의 탄생'


한 외국인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당시 한국을 방문해 기념품을 고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 외국인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당시 한국을 방문해 기념품을 고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교육을 받은 자녀가 이름 있는 대학에 입학하고, 계속되는 가족의 투자로 스펙을 쌓으며, '괜찮은 일자리'를 얻고 나면 주식 투자를 시작하고, 집 한 채 가지면 부동산 투자를 통해 노후를 대비하는 삶."

신간 '1988 서울, 극장도시의 탄생' 서두에서 묘사한 2000년대 한국 사회의 "정상적인 생애 경로"다. 저자인 박해남 계명대 사회학과 조교수는 한국 사회가 이런 정상과 비정상이란 삶의 외양을 가르기 시작한 분기점을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지목한다.

저자는 "올림픽은 아파트뿐만 아니라 백화점·공원·미술관·공연장 등 정상적인 삶의 외양에 필요한 여러 요소를 서울, 그중에서도 강남에 집중적으로 배치시켰다"며 "무엇보다도 서울올림픽은 세계인의 시선을 앞세워 정상적인 습속에 관한 담론을 무한정 창출했다"고 설명한다.

외국인의 시선을 내면화한 극장도시, 서울



1988년 개최된 서울올림픽 당시 성화 봉송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8년 개최된 서울올림픽 당시 성화 봉송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 외국인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당시 한국을 방문해 기념품을 고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 외국인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당시 한국을 방문해 기념품을 고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저자는 이런 측면에서 서울올림픽을 하나의 거대한 공연으로, 서울을 무대이자 극장 도시로 비유한다. 그러면서 올림픽이 세계의 관객을 상대로 개최 도시 혹은 국가가 지닌 긍정적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한 편의 공연이었다며, 이 과정에서 한국의 도시와 사회에 남긴 흔적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실제로 수백만 명의 국민들은 올림픽의 개최가 결정된 1981년 9월 30일부터 막을 내린 1988년 10월 2일까지 성실한 배우로 동원됐다. 그럴싸하고 화려한 무대 장치 위 질서 정연한 국민을 연기했다. 새마을운동, 사회정화위원회, 범민족올림픽추진중앙협의회 등 각종 민관 단체는 서울이란 무대를 정리하고 단장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기준은 외국인의 시선이었다. "외국인들이 불쾌해하는" 뱀탕, 토룡탕, 보신탕집을 이전했다. 이들의 시선이 닿는 성화 봉송로, 철도노선, 고속도로, 관광지 주변이 우선 정비 대상이었다. 도시 경관을 위해 빈민을 외곽으로 몰아내고 판자촌을 밀어냈다.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1985년 10월 올림픽 재개발 비판 팸플릿, '겨울에 어디로 가야 하나? 사람이냐? 올림픽이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휴머니스트 제공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1985년 10월 올림픽 재개발 비판 팸플릿, '겨울에 어디로 가야 하나? 사람이냐? 올림픽이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휴머니스트 제공

당시에도 이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 불문학자 김화영은 1983년 한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왜, 언제부터 우리들의 판단 기준은 사소한 일에서까지 외국인 쪽에 가 있는지 알길이 없다"며 "도대체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시시각각 감시하는 듯한 눈을 가진 '외국인'은 어느 나라 국적을 가진 사람일까?"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88년 체제 한계" 마주할 때


올림픽 이후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은 국제 행사 준비 척도의 중요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5년 뒤, 1993년 대전엑스포를 앞두고 유통된 "대전시민 질서의식 세계로 과시!" "참여하는 EXPO 세계 속의 선진 위생" "EXPO 개최지 시민으로서 부끄럽지 않습니까?"와 같은 표어에서도 드러난다. 현재 유튜브를 포함해 각종 미디어에서 활황인 '국뽕 콘텐츠'의 인기는 여전히 외국인의 시선과 평가에서 자유롭지 않은 한국인의 내면을 방증한다.


서울은 올림픽이 끝난 후 "외국인의 시선을 내면화한 채 과시와 연출이 일상인 극장도시로 재구성됐고, 시민들은 권리를 가진 주체가 아니라 늘 타인의 눈에 잘 보여야 하는 배우"가 됐다. 저자는 이런 "전시적이고 과시적인 사회적 삶"을 '88년 체제'로 정의한다. 문제는 이 같은 사회 체계가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을 매일 오디션 같은 삶을 영위하게"할뿐더러 "낡고, 지저분하고, 어수선한" 것들을 너무 쉽게 무대 바깥으로 추방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저자의 논지대로라면 1988년 서울올림픽은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다.

저자는 "2020년대를 넘어가며 많은 사람이 87년 체제의 한계를 말하고 또 이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를 논하고 있지만 88년 체제의 한계야말로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마주해야 할 과제"라며 "관객석에 앉아 무대 위의 배우를 평가하는 리바이어던을 어떻게 사회 구성원의 삶의 무대를 지탱하는 리바이어던으로 전환시킬 것인가 등의 질문을 진지하게 마주해야 할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고 꼬집는다.

1988 서울, 극장도시의 탄생·박해남 지음·휴머니스트 발행·384쪽·2만4,000원

1988 서울, 극장도시의 탄생·박해남 지음·휴머니스트 발행·384쪽·2만4,000원

송옥진 기자 click@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