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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이지...진한 국물이 있는 김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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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이지...진한 국물이 있는 김해 여행

서울구름많음 / 0.0 °
재첩국에서 멸치국수까지 국물의 끝판왕을 만나다
‘달마야 놀자’ 찍은 은하사에서 만난 이국의 공주
김해 고분군과 국립가야박물관, 그리고 수로왕릉


지인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목적지는 김해. “김해에 뭐 볼 게 있다고요?” 하고 의문을 가지는 분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 번 가보시길. 어디를 가더라도 볼 것은 반드시 있는 법이니까. 비행기를 타고 다녀온 김해 여행을 소개한다.

김해 수로왕릉의 쌍어 문양

김해 수로왕릉의 쌍어 문양


아기 손톱 같은 재첩이 뿜어내는 향

6월 어느 날, 김포공항 국내선 청사. 김해공항으로 가는 오전 7시 20분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밤새 세차게 내리던 비는 새벽녘 다행히 그쳤다. 나는 김해에서 태어나 이십 년 가까운 시간을 김해에서 보냈다. 내가 태어났을 때 김해는 군이었고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시가 됐다. 중학교에 다닐 때 롯데리아와 피자헛이 처음 생겼다. 여행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 김해는 경전철이 다니고 50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사는 큰 도시가 됐다.

이번 여행에는 시인 겸 편집자 M, 시인 O, 편집자 U가 함께 한다. 일단 뭐부터 먹을까. 사람에게 첫인상이 중요하듯, 여행지에서도 첫 끼가 상당히 중요하다. 처음 맛보는 음식이 형편없을 경우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가지게 될 확률이 높다. 이제 겨우 오전 9시. 문을 연 식당은 아마 대부분이 해장국 집일 것이다. 하지만 김해에서의 첫 끼를 뼈다귀해장국으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명색이 김해 출신의 여행 작가인데, 시뻘건 뼈다귀해장국이 담긴 뚝배기 앞으로 데려갈 수 없는 일이다.

(위)김해에서 먹은 재첩국 (아래)재첩전

(위)김해에서 먹은 재첩국 (아래)재첩전


“추어탕, 돼지국밥, 재첩국, 칼국수, 멸치국수가 있어, 뭐부터 먹을까?”

“돼지국밥과 추어탕은 먹어봤으니 재첩국 어떨까요?” O가 말했다. 좋아. 재첩국으로 결정. 사실 나도 재첩국이 먹고 싶었다. 예전에 김해에서는 재첩이 많이 났다. 낙동강은 바다로 흘러가기 전, 명지라는 곳에 하얀 모래를 곱게 펼쳐 놓는데, 그 모래 속이 온통 재첩 천지였다.

아기 엄지손톱만 한 재첩이 봄이면 특유의 향을 모래 사이로 뿜어낸다. ‘풍선배’라고 부르는 재첩잡이 배들이 강에 가득 떠서는 기다란 대나무 장대 끝에 매단 갈구리(갈고리)로 재첩을 긁어 올리곤 했다. 노을 질 무렵이면 장관을 이루었다. 당시 명지는 하동 못지않은 재첩 산지였지만 지금은 모래톱(벌판)이 사라져 아주 적은 양만 난다.


수로왕릉에 있는 허황옥 상

수로왕릉에 있는 허황옥 상


재첩국 한 그릇에 우리는 기분이 좋아졌다. 자, 이제 어디로든 가자. 좋은 여행을 만들려면 일단 맛있는 음식을 먹을 것. 그 다음엔 좋은 풍경 쪽으로 갈 것. 그래서 우리는 다음 코스로 은하사를 골랐다. 구불구불 이어가는 길을 에어컨을 끄고 차창을 열고 달린다. 여름 같지 않게 바람이 시원하다.

신어산 중턱 고즈넉한 절, 은하사

은하사는 신어산 중턱에 자리한 아주 오래된 절이다. 영화 ‘달마야 놀자’를 찍으며 알려진 이곳은 김수로왕이 창건하라는 명을 내려 만들어진 절이다. 장유화상은 이 절의 주지였다. 과거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건 김해를 통해서였다. 인도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이 오빠인 장유화상 허보옥과 함께 불탑인 파사석탑 등을 가지고 온 것이라는 설이 근래에 들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가야라는 국명도 부처가 도를 깨달은 인도 부다 가야(GAYA)에서 따온 불교 범어로 추측한다.

(위로부터)신어산 중턱에 자리잡은 은하사 오르는 길

(위로부터)신어산 중턱에 자리잡은 은하사 오르는 길


절 아래 공터에 차를 대고 은하사로 가는 돌계단을 오른다. 계단 너머로 대웅전 현판이 살짝 보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도다. 나는 그 구도 앞에 서 있는 잠깐의 이 순간이 너무나 좋다. 강진 무위사와 영주 부석사도 이 구도 앞에 설 수 있다. 대웅전 현판이 살짝 보이는 그 순간,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춘다. 그때면 내 속으로 뭔가가 찌르르하고 날아 들어오는데, 내 마음속에 달린 풍경이 ‘댕강’ 하고 울린다.


혼자였다면 크게 심호흡을 하고 합장을 하지만, 동행이 있을 때는 눈치를 보며 아주 짧은 시간 멈춰 서서 후다닥 합장을 한다. 그렇다고 특별히 기도하는 내용 같은 건 없다. 이젠 이루고 싶은 것도 그다지 없고, 갖고 싶은 것도 딱히 없는 나이다. 그런데 이렇게 잠깐 합장하고 나면 내가 약간은 착한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실제로 은하사나 무위사에 가 보면 지금 이 문장이 이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이해하지 못할 뭔가가 있는데, 그걸 이해하기 위해 향하는 것. 우린 그걸 여행이라고 부른다.

김해평야와 교련복의 추억 … 김해 분산성

(위로부터)웅장한 분산성, 분산성에서 내려다 본 김해

(위로부터)웅장한 분산성, 분산성에서 내려다 본 김해


언제부터인가 여행을 가면 그곳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한다. 높은 곳에 올라 마을 또는 도시를 내려다보는 그 시간이 좋다. 아파트가 다닥다닥 붙어있고 그 사이로 강물이 천천히 흘러간다. 노을이 질 무렵, 이런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여러 가지 감정이 든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끝없이 생겨나는 것이 사는 것이구나’ ‘내가 살아가는 생활이 저기 있구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평범한 사실이지만 그 사실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그리고 가끔 지나온 인생이 생각나기도 하면서 조금 센티멘털해지기도 한다.

아무튼 이렇게 장황한 말을 하고 있는 건 내가 지금 김해 분산성에 있기 때문이다. 김해 사람들은 외지인이 “김해에서 가장 풍광이 좋은 곳이 어디입니까” 하고 물을 때면 이곳을 알려준다. 이곳에 서면 남쪽으로는 김해평야가 내려다보인다. 김해시는 물론 멀리 창원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성은 둘레 923미터, 폭 8미터 정도 된다. 차가 성 바로 아래까지 올라간다. 분산성은 고려 때 김해부사 박위(?~1398년)가 쌓았다. 당시에는 왜적의 침입이 심했다. 당시 김해는 바다를 면한 도시였다. 기록에는 옛 산성을 보수해 확장했다고 했으니, 아마도 최초 축성은 가야 때 이루어졌을 것이다.


분산성 가는 숲길

분산성 가는 숲길


이곳에는 저물 무렵에 와 노을과 해지는 도시의 풍경을 보고 싶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서둘러 올라왔다. 고등학교 시절, 교련복을 입고 행군을 해(믿기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매주 토요일마다 학교 운동장을 돌며 열병식을 했다) 여기까지 온 적이 있다. 온통 논밭으로 드넓던 곳이 이제는 아파트로 빽빽하다. 까까머리 고등학생은 어느새 턱에 흰 수염이 가득한 중년의 아저씨가 됐다. 그동안 나이를 많이 먹었다. 나이를 먹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그건 세월의 일이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기를 헛되이 보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인데, 다행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분산성은 촘촘하게 돌을 쌓은 부분도 있고, 간혹 허물어진 부분도 보이는데 그 모습이 어울려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우리의 인생도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성곽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러는 사이 어깨 위로 빗방울 몇 알이 떨어졌다. 이제 점심을 먹으러 가야겠다.

만리향의 군만두

만리향의 군만두


수로왕릉에서 김해 사람들처럼 산책하다

“군만두 하나, 찐만두 하나, 새우만두 하나, 오이장육 하나 주세요.” 우리는 아주 오래된 만두 전문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1979년 문을 연 곳이다.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수로왕릉으로 갔다. 수로왕릉은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 대왕을 모신 곳이다.

옛이야기는 이렇게 전한다. ‘거북아 거북아(龜何龜何) / 머리를 내어라(首其現也) / 내놓지 않으면(若不現也) / 구워서 먹으리(燔烵而喫也)’. 사람들은 끝없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마침내 붉은 보자기를 받았는데 그 속에 6개의 황금알이 있었다. 이 알들은 6명의 왕이 되어 여섯 가야를 건국했다. 가장 먼저 태어난 이가 바로 수로왕이다. 가락국의 왕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다. 그는 최초로 외국인과 결혼했는데, 바로 앞서 언급한 인도에서 온 왕비 허황옥이다.

(위로부터)김해의 시조 김수로를 모신 수로왕릉, 수로왕릉의 굽은 소나무

(위로부터)김해의 시조 김수로를 모신 수로왕릉, 수로왕릉의 굽은 소나무


수로왕릉은 김해 구산동 아파트 단지 앞에 있다. 시장도 가깝다. 김해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수로왕릉을 거닐며 산책을 즐긴다. 왕릉 한쪽에는 커다란 고인돌도 있다. 기원 전 4~5세기경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로왕의 재위 연도가 기원후 42년이니, 당시에도 아득한 옛날 어느 족장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왕릉 안에 또 다른 왕릉이 있는 셈이다.

수로왕릉에서 우리는 김해 사람들처럼 산책했다. 굵은 소나무 사이로 난 휘어진 길을 따라 심호흡을 하며 걸었다. “경주와 비슷하지만 느낌이 또 달라.” 김해는 경주와 분명 다르다. 이제는 알겠다. 옛날에는 거기가 다 거기지 했는데, 여행을 직업 삼아 오랫동안 돌아다니다 보니 경주는 경주고 김해는 김해다. 광주는 광주고 대전은 대전이다. 파리는 파리고 서울은 서울이다.

(좌로부터)수로왕릉, 국립가야박물관에 전시된 가야의 갑옷

(좌로부터)수로왕릉, 국립가야박물관에 전시된 가야의 갑옷


김해 사람들이 멸치국수를 먹는 법

가야의 유물을 모아 놓은 국립가야박물관을 돌아본 후 마지막 남은 한 끼를 멋지게 해결하고 올라가기로 했다. “자, 이제 김해에서의 마지막 한 끼가 남았어. 뒷고기와 멸치국수. 뭘 먹을까?” ‘뒷고기’는 김해 사람에게 추억의 음식이다. 김해에는 도축장이 2곳이나 있는데, 1980년대 이 도축장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이 돼지를 손질하면서 고기를 조금씩 빼돌려 선술집 같은 곳에 팔아 용돈벌이를 하며 뒷고기로 불리게 됐다.

한 곳에서 너무 많이 떼면 표가 나기 때문에 여러 부위에서 조금씩 떼어내다 보니 목덜미살이며 볼살 등이 잡다하게 섞여 있었다. 실제로 고등학교 때만 해도 뒷고기는 엄청나게 쌌다. 나와 친구들은 떡볶이를 안 먹고 뒷고기를 먹었다. 수로왕릉 근처에 포장마차가 많았는데,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친구들과 뒷고기를 먹고 집으로 가곤 했다.

김해 고분군

김해 고분군


공항 가는 길에는 한국에서 제일 맛있는 멸치국수를 내는 곳이 있다. “아마 여기 멸치국수를 먹고 나면, 다른 곳의 멸치국수는 시시하게 느껴질 거야.” 내가 말하자 “멸치국수요!” 하고 U가 씩씩하게 메뉴를 말했다.

이 집이 국수를 내는 방식은 좀 독특하다. 국수를 시키면 육수를 담은 주전자가 먼저 나온다. 손님들은 컵에 육수를 따라 먼저 맛본다. 여기서 일단 감탄을 한다. “와, 이런 육수는 처음이에요.” 한 입 맛본 U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터프하고 강력합니다.” O가 말했다. “나도 집에 가서 들통에다 끓여보고 싶다.” M이 말했다. 국수 그릇에는 육수가 없다. 면이 담겨 있고 그 위에 채 썬 단무지와 데친 부추, 김 가루, 깨소금이 꾸미로 넉넉하게 올라가 있다. 육수를 자작하게 붓고 국수를 먹다가 반쯤 먹었을 때, 다시 한번 육수를 넉넉하게 붓는다. 이러면 궁극의 멸치국수가 완성된다.

공항 가는 길에 위치한 대동할매국수

공항 가는 길에 위치한 대동할매국수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멸치를 다듬지 않으셨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였다. 경상도에서는 멸치 대가리와 내장을 발라내지도 않는다. 그냥 통째로 넣고 끓여 국물을 우려낸다. “아까운 메르치(멸치) 똥은 와 버리는데.” 서울 사람들이 왜 멸치 내장을 안 발라내느냐고 하면 경상도 사람은 이렇게 대답한다. 싱싱하지 않은 멸치는 내장을 빼지 않으면 비리고 쓴맛이 난다. 하지만 남해 가까운 경상도에서는 싱싱한 멸치를 구하기 수월하기 때문에 내장을 따로 제거하지 않았다. 진하고 투박한 맛을 좋아하는 경상도 사람의 입맛도 한 원인일지도 모른다.

“아마 서울 돌아가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이 국수일 거야.” 내가 말하자 U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요.”

이곳은 다시 공항이다. 김포행 밤 9시 20분 출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 시각은 7시. 아직 시간은 넉넉하다. 기상 관계로 30분 출발 지연이라는 메시지가 뜬다. 체크인 카운터로 가서 혹시 더 빨리 출발하는 비행기가 있는지 물어본다. 다행이다. 8시 출발 비행기에 좌석이 남아 있다. 역시 공항에는 일찍 오는 것이 좋다. 맛있는 국수로 여행을 마무리하고 예정보다 일찍 출발한다. 끝이 좋다. 여행도 인생도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이다.

김해 여행 정보
(위) 파우제앤숨의 맛있는 빵 (아래) 화포메기국의 메기탕

(위) 파우제앤숨의 맛있는 빵 (아래) 화포메기국의 메기탕


만리향은 곡충의 대표가 운영하는 곳으로 오향장육과 만두만 판다. 만두는 피가 얇고 쫄깃함이 살아 있다. 대동할매국수의 멸치국수는 강력한 감칠맛과 통멸치로 우려낸 특유의 쌉싸래한 맛이 어우러진,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육수 맛을 낸다. 중면을 쓰는데, 소면의 얇은 질감으로는 이 묵직한 육수의 무게와 부추 등 다양한 꾸미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수로왕릉에서 가까운 카츠타다이는 일본 레트로 감성이 가득한 다양한 소품과 캐릭터 용품이 가득한 공간이다. 마치 도쿄의 동네 문방구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주인이 일본 각지에서 직접 수집해 온 물건을 판다. 김해 대동면의 한적한 마을에 자리한 파우제앤숨(Pause & Sum)은 자연 속에서 커피와 베이커리를 즐길 수 있는 대형 정원 카페다. 이름 그대로,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고 싶은 이들에게 딱 맞는 공간이다. 진영의 화포메기국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 즐겨 찾던 곳이다.

수로왕릉과 가까운 소품 숍 ‘카츠타다이’

수로왕릉과 가까운 소품 숍 ‘카츠타다이’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86호(25.07.01)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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