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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책장에는 제품 설명서를 모으는 파일첩이 있다. 청소기, 여행 가방, 정수기, 전기포트 등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제품의 설명서부터 헤드폰과 스피커, 게임기 같은 취미용품의 설명서까지 차곡차곡 보관돼 있다. 설명서의 형태와 두께는 정보의 양에 따라 제각각이다. 어떤 것은 인쇄된 종이 한 장을 간단히 잡은 리플릿 형태이지만, 페이지가 많아서 스테이플러로 엮은 책자 형태의 설명서도 꽤 있다. 두꺼운 설명서의 경우, 사용자가 필요한 내용을 빠르게 펼쳐볼 수 있도록 표지에 목차를 기입한다. 기본으로 들어가는 항목은 ‘제품의 특징’ ‘안전을 위한 주의사항’ ‘기능 및 사용방법’ 등이다. 조립이나 설치가 필요한 제품은 상세한 그림 설명을 넣는다. 손수 조립하거나 설치하지 않더라도 그림을 자세히 보아두면 도움이 된다. 주요 부분의 고장이 아니라면, 느슨해진 나사를 조인다거나 부품 일부를 교체하는 정도로 간단히 문제가 해결되는 예도 있기 때문이다.
제품 설명서는 하나의 물건을 주제로 구성된 읽을거리이기도 하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물건을 해체해서 그려 놓은 구조도이다. 그림으로 각부의 명칭과 구조를 파악하고 나면, 낯선 물건도 금세 친숙하게 느껴진다. 가장 집중해서 보는 부분은 역시 ‘안전을 위한 주의사항’이다. 이 항목은 ‘경고!’ ‘주의!’ 등 눈에 띄는 문자들과 함께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가 위험한지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나 픽토그램을 곁들인다. 어떤 설명서는 주의사항만 3페이지가 넘는다. 이토록 많은 주의 항목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을까? 딱히 위험할 것 같지 않은 사무용 의자의 설명서에 이런 문구가 있다. ‘제품을 이용해 운동하다가 제품이 넘어질 경우 상해 및 사망의 위험이 있습니다.’ 설마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있나, 의심을 품다가도 그다음 문구를 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제품에 앉은 상태에서 높은 곳에 다리를 올리지 마세요.’ 이건 내가 자주 하는 짓인데… 그제야 현실 감각을 되찾는다. 그렇다. ‘현실’에는 미처 상상하지 못하는 일들이 왕왕 일어난다. 그리고 그 사례들은 누적되어 제품 설명서에 경고 문구로 등재되는 것이다.
비록 설명서 끝에 붙은 텅 빈 보증서는 아무 효력이 없지만(요즘은 구매영수증이 보증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 수리 규정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여전히 유익하다. 제품 보증기간이 얼마인지, 무상수리와 유상수리의 기준은 무엇인지, 해당 모델의 부품은 언제까지 보관하는지, 인터넷으로 찾으려면 한참 걸리지만 설명서를 펼치면 단숨에 알 수 있다. 물건을 고장이나 사고 없이 오래 쓰고 싶다면, 설명서를 꼼꼼하게 읽는 것부터 시작이다. 나의 안전을 위해서도 그래야 하고, 때로는 제품의 고장이 내 잘못이 아님을 확신하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더구나 혼자 쓰는 물건이 아니라면 설명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 문장을 실천하는 것이 좋겠다.
‘읽어 보신 후 누구나 언제라도 볼 수 있는 장소에 보관해 주십시오.’
■모호연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 일상 속 자원순환의 방법을 연구하며, 우산수리팀 ‘호우호우’에서 우산을 고친다. 책 <반려물건> <반려공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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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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