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되면 철도역이나 지하철역, 버스터미널 같은 대중교통 거점에 가는 게 곤욕스러워진다. 새벽부터 밤까지 수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이들 시설의 내부 공기가 아무런 움직임 없이 고여 있고 또 뜨겁기 때문이다. 이들 시설에서 공조 설비, 특히 에어컨을 사용해 실내 공기와 온도를 조절하는 것을 꺼리는 사회적 분위기에 따른 결과다.
코로나 19가 유행할 당시 공조 설비를 가동해 실내 공기가 고이지 않게 함으로써 감염을 막을 수 있다는 논의가 이뤄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논의는 유야무야 끝났고, 올여름에도 공공 교통 거점의 공기는 축축하고 후끈후끈하다.
올해 강릉에서 부산 부전까지 잇는 동해선이 개통했다. 새로이 탄생한 노선을 살피기 위해 얼마 전 탑승했는데, 실외 기온이 30도에 육박하는 중에도 열차의 공조 설비를 거의 작동시키지 않아 승객들이 괴로워하는 상황을 목격했다. 가끔씩 더위에 지친 승객들이 항의하면 선선한 공기를 순환시키는 것으로 보아 공조 설비가 고장 난 건 아니었다.
장맛비가 내리거나 폭우가 쏟아지는 시기에 가게 문을 열어놓고 있는 곳을 보면 일단 피하게 된다. 이런 가게는 비가 내려서 바깥이 시원하니 에어컨을 틀 필요가 없다는 마인드를 가진 경우가 많다. 에어컨은 단순히 공기의 온도를 내리는 설비가 아니라 습도를 줄여서 쾌적함을 유지하는 공조 기능도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민들이 많다.
이런 인식의 배후에는 전기를 절약해야 한다는 사회 전반의 인식이 존재한다. 원자력발전소 운영·증설에 반대하는 세력뿐 아니라 시민사회의 상당 부분에서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것이 아깝다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다. 이런 인식이 도시의 다른 부분에 반영된 것이 밤에도 어둡게 유지되는 조명, 그리고 빌딩 사용자에 비해 지나치게 적은 엘리베이터다.
어떤 도시나 빌딩이 전기를 아낀다는 것을 외형적으로 잘 드러내는 게 야간에 그 도시 공간이나 빌딩의 조명을 어둡게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야간에 도시 조명이 어두우면 치안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전기를 아낀 결과 시민들의 안전에 문제가 생긴다면, 과연 그 도시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얼마 전 찾아간 고층 빌딩에서는 수많은 회사가 입점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를 딱 네 대 설치해놓은 바람에 이용객들이 빌딩 정문 근처까지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봤다. 빌딩 보안을 담당해야 하는 관리원분들이 엘리베이터 줄을 관리하느라 진땀 빼고 계신 모습을 보면서 건물 설계가 실패한 책임을 사람들로 때우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건물 설계를 실패한 바람에 위험이 발생하는 또 다른 사례는 좁은 화장실이다. 화장실 칸에 들어가려 할 때 문을 열자마자 변기가 설치돼 있는 바람에 옷이나 짐이 변기에 닿는 경우를 흔히 겪는다. 몸이 변기에 닿으면 위생상 문제가 생긴다. 어떤 집이 잘 지어졌고 잘 관리되는지를 알 수 있는 최종 장소가 화장실이라 하지 않는가. 아무리 호화로운 건물이라도 화장실 칸이 좁은 것을 보면 그 건물의 소유주나 설계자가 현대 도시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이 전근대적임을 짐작하게 된다.
폭염이 심한데도 불구하고 전기를 아끼자는 인식 때문에 에어컨을 틀지 않다가 사망하는 시민들이 늘어나자 일본 정부는 에어컨이 사치가 아니라 필수라고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또 이를 위한 각종 발전·송전 설비의 정비와 신설에 힘쓰고 있다. 기상이변이 항상화된 현재, 전기를 아끼자거나 더위를 정신력으로 이길 수 있다는 마인드로는 시민들의 안전이 위협받게 된다. 시민들은 전기를 무조건 아끼는 대신 충분히 사용하는 것이 현대 도시의 근본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고, 정부는 이를 위한 발전·송전 및 공조 설비를 갖추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김시덕 도시문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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