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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 한 주택가 전봇대 모습.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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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진 | 프랑스 국립 건축가
“건물 잘 짓는 것보다 준공 사진 속 전선 지우는 게 더 어렵다.”
국내 건축가들 사이에서 술자리 농담처럼 오가는, 그러나 꽤 많은 사실을 의미하는 말이다. 건물이 완공될 무렵이면 늘 그렇듯 기록과 홍보를 위해 사진 촬영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촬영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건물을 가로지르거나 배경을 휘감는 전선과 전봇대를 하나하나 지우는 후보정 작업이다. (실제로 우리가 잡지와 인터넷에서 보는 멋진 건물 사진 대부분은, 그런 후보정을 거친 이른바 ‘뽀샵’ 사진이다.)
익숙함은 인식을 흐린다. 한 공간, 한 장소, 한 도시에 오래 살면 그곳에 대한 감각은 무뎌진다. 어느새 그 도시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전선들을 인지하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자연물처럼 받아들여진다. 한국 문학에서 전봇대만큼 자주 등장한 도시의 오브제가 있을까? 추억의 밤길, 노상에서 친구와 나누던 허물없는 순간의 배경으로, 까치들이 줄지어 앉아 고향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장치로 전봇대는 익숙하고도 애틋한 존재다. 언젠가부터 전봇대는 ‘우리 도시’의 풍경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서울에 처음 온 외국인의 시선이 가장 먼저 머무는 것도 바로 이 전봇대라는 점이다. 서구 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기 때문이다. 유럽과 북미는 전선을 지하에 매설하는 지중화 방식이 일반적이다. 반면 한국의 전선 지중화율은 아직 50퍼센트에 미치지 못한다. (참고로, 일본 도쿄도는 5퍼센트 미만이다. 일본 문학에 전봇대가 더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일차적으로는 산지와 하천이 많은 지형의 영향이 있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원인은 한국의 근현대 도시개발사에 있다. 급격한 도시 팽창 속도에 비해 도시 인프라는 준비되지 못했다. 인구는 몰려들었지만, 기반시설은 사후적으로 임시방편으로 따라붙었다. 전봇대와 전선은 그 결과물이다. 처음부터 일관된 계획 없이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늘려온 인프라 행정 뒤로 전선은 얽히고 꼬였고, 전봇대는 거미줄처럼 도시를 매달고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바로 지번주소라는 한국과 일본만의 특이한 토지구획 체계다. 지번주소제는 전근대 농촌 사회 기반이었던 일본에서 토지 정비를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20세기 초, 전국적인 토지조사와 함께 식민통치를 위해 조선에도 도입되었고, 이후 1세기가 넘도록 우리는 ‘○○동 ○번지’라는 주소에 익숙해졌다. 이 주소체계의 문제는 명확하다. 필지 간에 도로가 아닌 경계선으로만 구분되어 있어 도로 인식이 희박했고, 이는 곧 도시 기반시설을 체계적으로 구축하는 데 걸림돌이 됐다. 도로가 없으면 지중화도 어렵다.
2차대전 이후 일본을 점령한 미군정은 이해하기 힘들었던 이 지번주소 대신 도로명주소 체계를 도입했다. 일본은 이를 계기로 1962년, 자발적으로 주소체계를 개편한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늦게, 2014년에야 도로명 주소를 도입했다. 하지만 여전히 두 체계가 혼용되는 현실은, 주소에 깃든 인습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보여준다. 전봇대는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떤 방식으로 타협하고 임시방편을 반복했는지를 드러내는 증거물이다. 때로는 도시의 숨은 문장이고, 때로는 근대성의 그림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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