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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십이야> 배우 옆에 그림자처럼 따라 붙은 ‘수어통역사’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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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십이야> 배우 옆에 그림자처럼 따라 붙은 ‘수어통역사’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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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십이야>에서 최황순 수어통역사(맨 왼쪽)이 극중 마름 역 배우(성원)와 합을 맞추며 수어 통역을 하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연극 <십이야>에서 최황순 수어통역사(맨 왼쪽)이 극중 마름 역 배우(성원)와 합을 맞추며 수어 통역을 하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호랭이도 지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저기 오네.” 의미를 설명하는게 새삼스러운 이 대사를 수어로 풀어낸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무대에는 사람만 있는데 ‘호랑이가 왔다’고 하면 생뚱맞고, ‘누군가 나타났다’고만 하면 느낌이 살지 않는다.

지난 20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최황순 수어통역사(52)는 “다행히 수어에 ‘호랑이랑 딱 맞닥뜨렸네’라는 관용 표현이 있었다”며 손짓으로 ‘어흥’을 하고 얼굴을 힘차게 가르켰다. 최씨가 전달한 손말은 지난 12일 개막한 국립극단 연극 <십이야>의 한 장면. 그는 “연극은 시각과 소리 정보가 합쳐지기 때문에 대사를 단순 전달해서는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다”며 “무대에 서는 수어통역사들도 막혀있는 의미의 실타래를 풀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국립극단은 장애인의 관람 장벽을 낮추기 위해 한국수어통역과 한글자막해설 등을 제공하는 ‘접근성 회차’를 운영하고 있다. 개막일(12일)부터 나흘간 진행된 <십이야>의 접근성 회차는 ‘그림자 수어 통역’으로 운영돼 또다른 볼거리가 됐다. 얼굴을 허옇게 칠하고 시커먼 무대 의상을 입은 수어통역사 7명이 배우 옆에서 실시간 수어 통역을 제공한 것이다.

연극 <십이야>의 접근성 회차는 ‘그림자 수어 통역’을 제공한다. 수어통역사들이 배우와 함께 무대에 올라 수어 통역을 하는 동시에 배우와 호흡을 맞춘 연기를 선보인다.  국립극단 제공

연극 <십이야>의 접근성 회차는 ‘그림자 수어 통역’을 제공한다. 수어통역사들이 배우와 함께 무대에 올라 수어 통역을 하는 동시에 배우와 호흡을 맞춘 연기를 선보인다. 국립극단 제공


재치 넘치는 무대로 정평 난 임도완 연출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십이야’를 조선시대로 옮겼다. 일란성 쌍둥이 남매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네 남녀의 좌충우돌 사랑 이야기라는 뼈대는 그대로지만, 마당놀이나 탈춤처럼 신명나는 무대가 펼쳐진다. 사투리와 외국어가 뒤섞인 대사에 감각적인 음악과 움직임이 더해져 객석에선 쉴새없이 웃음이 터지는데, 문득 수어통역사들이 이 내용을 어떻게 전달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심지어 배우랑 ‘티키타카’ 합을 맞춰 연기까지 선보인다.

“<십이야>도 꼬박 한 달은 걸렸어요. 제가 미리 초벌 번역은 해놓고요. 한 달 기준으로 절반은 각자 맡은 부분 번역에 힘을 쏟고, 나머지 절반은 무대에서 움직임을 맞추는데 쓰게 되죠. 특히 이번 공연엔 배우 출신 통역사가 네 명이나 참여했습니다.”

연극은 ‘서브텍스트’라고 할 만한 의미 정보가 얽혀들기 때문에 일반적인 수어 통역 보다 까다롭다. “추리물에서 ‘블랙커피’가 사건의 결정적 단서라고 하면 배우가 대사에서 강조를 하든 커피 앞에서 뜸을 들이든 관객들이 나중에 깨달을 수 있도록 암시할 수 있죠. 수어 통역을 하면서 ‘숨은 정보’를 대놓고 설명하거나 지시하면 극의 재미가 떨어지잖아요. 손짓을 느리게 하든 인상을 쓰든 방법을 강구해야죠. 배우들의 감정 연기나 비유적 표현도 마찬가집니다.”


임도완 연출은 지난해 <스카팽>에 이어 <십이야>에서도 수어통역사들을 배우처럼 무대에 올려 재미를 배가시켰다. “극 마지막에 쌍둥이 오빠 미언의 정체가 밝혀지고 신원 확인을 위해 경상도 사투리 ‘데이~’를 시키는 장면이 있어요. 배우가 ‘제가 진품입니데이~’라는 대사를 하면서 머리를 넘기거든요. 사투리를 표현하기 위해 ‘데이’에서 어깨를 튕기고 머리를 따라 넘겼죠. 또 결혼식 장면에서 대부분 관객들이 모를 프랑스어와 한국어가 번갈아 이어지는 웃긴 부분이 있는데 그 느낌을 살리기 위해 영어 수어를 사용해보기도 했고요. 저희가 고민한 디테일들입니다.”

최황순 수어통역사가 지난 20일 서울 명동예술극장 회의실에서 공연 수어 통역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최황순 수어통역사가 지난 20일 서울 명동예술극장 회의실에서 공연 수어 통역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최씨는 1997년 민간 수화통역사 자격증 시험 1기로 합격하며 이듬해 활동을 시작한 베테랑이다. 2019년쯤부터 국·공립 극장을 중심으로 수어 통역이 확산한 이후 그간 참여한 공연만 서른 편 정도. 통역사들 사이에선 ‘원전주의’와 ‘해석주의’ 사이의 고민도 있었다고 한다. “‘연출 의도가 있었을테니 표현을 그대로 써야 한다’와 ‘그대로 옮기면 말이 안 통할 수 있으니 바꿔야 한다’는 입장차가 있는거죠.”

최씨는 열악한 소극장에서의 경험이 방향성을 잡는데 도움이 되었다. “아는 농인 관객이 수어통역사와는 가까운데 자막 모니터가 안보이는 자리에 앉았어요. 연극이 끝나고 번역이 어땠냐고 물으니까 그런 건 됐다면서 ‘할머니가 치매였냐’고 자기가 궁금한 내용을 묻더라구요.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분이 극의 흐름이 이해되니까 빠져든거였죠. 단순 번역이 아닌 각색으로, 연극을 이해하게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최씨가 생각하는 문화 향유의 기본은 ‘선택권’이다. “내가 시간이 안돼서 안 갈 수는 있는데 볼 기회조차 없어선 안되잖아요. 장애인들의 선택권 보장을 통해 공연의 저변 자체가 넓어질 수도 있고요.”

접근성 회차가 있는 날이면 명동예술극장 주변 맥도날드에선 수어로 열띤 토론을 벌이는 모습이 눈에 띄는 것도 그간의 변화다. “아는 분을 발견하면 ‘오늘 공연 어땠어?’ 물어봐요. 그럴 때 짜릿한 피드백이 있어요. ‘쌤, 눈이 되게 시원했어!’ 최고의 수어 칭찬입니다.”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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