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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통화 녹취'로 태국 정치 흔드는 캄보디아 훈센..."민감 대화 공개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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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통화 녹취'로 태국 정치 흔드는 캄보디아 훈센..."민감 대화 공개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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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유출 불신임 위기' 패통탄 정부 흔들기
정치 잔뼈 굵은 훈센에 태국 권력 지형 출렁


28일 태국 방콕에서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사퇴를 촉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한 시위 참가자가 훈센(왼쪽) 캄보디아 전 총리의 얼굴이 그려진 손팻말을 들고 항의하고 있다. 방콕=로이터 연합뉴스

28일 태국 방콕에서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사퇴를 촉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한 시위 참가자가 훈센(왼쪽) 캄보디아 전 총리의 얼굴이 그려진 손팻말을 들고 항의하고 있다. 방콕=로이터 연합뉴스


태국 정국이 이웃 국가 캄보디아 실권자의 ‘입’에 흔들리고 있다. 훈센 전 캄보디아 총리가 태국 총리와의 통화 내용을 유출한 데 이어 태국 정부 수뇌부를 겨냥한 발언을 쏟아내며 정국 혼란을 부추기는 모습이다. 그가 지핀 불씨는 태국 내 대규모 정부 시위로 번졌다. 정치권에선 총리 탄핵까지 거론된다.

통화 유출에 불경죄까지 위협


29일 캄보디아 프놈펜포스트와 태국 방콕포스트 등에 따르면 훈센 전 총리는 전날 약 3시간에 걸친 인터넷 생중계 연설에서 “태국에 주변국, 특히 캄보디아와의 문제를 적극 해결할 수 있는 ‘새 총리’가 나타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는 패통탄 친나왓 현 태국 총리를 사실상 부정하는 내정간섭 성격의 발언이다. 자신이 지난달 15일 패통탄 총리와 나눈 통화 내용을 외부에 유출한 것을 두고도 “태국 총리가 어떤 추악한 짓을 저질렀는지 태국 국민에게 알린 것뿐”이라고도 주장했다.

패통탄 친나왓 태국 총리가 지난 24일 태국 방콕 정부청사에서 내각 회의를 마친 뒤 침통한 표정으로 나오고 있다. 방콕=로이터 연합뉴스

패통탄 친나왓 태국 총리가 지난 24일 태국 방콕 정부청사에서 내각 회의를 마친 뒤 침통한 표정으로 나오고 있다. 방콕=로이터 연합뉴스


양국은 지난달 말 국경 지역 영유권을 둘러싼 무력 충돌로 캄보디아 군인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을 겪었다. 패통탄 총리는 지난 15일 캄보디아 ‘상왕’으로 꼽히는 훈센 전 총리와 통화하며 해법을 모색하려 했지만, 그에 의해 대화 내용이 일방적으로 공개되면서 사태가 오히려 악화했다.

당시 패통탄 총리는 훈센 전 총리를 ‘삼촌’이라 부르며 국경 지역을 관할하는 자국 제2군 사령관을 비판했다. 훈센 전 총리는 해당 발언을 모두 녹음한 뒤 이를 자국 정치인 80여 명에게 공유했고, 통화 내용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태국에 충격을 줬다. 정상 간 대화를 녹취·유포하는 외교적 결례를 저지르고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적반하장식 태도를 보인 셈이다.

훈센 전 총리는 태국에서 ‘금기’로 여겨지는 왕실모독죄(불경죄)까지 들고 나와 친나왓 가문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였다. 그는 “패통탄 총리가 제2사령관을 모욕한 것은, 그를 임명한 태국 국왕을 모욕한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훈센 전 캄보디아 총리가 지난 26일 캄보디아와 태국 국경 인근 영유권 분쟁 지역인 프레아 비헤아르를 찾아 연설하고 있다. 프레아 비헤아르=캄보디아국영통신·AP 연합뉴스

훈센 전 캄보디아 총리가 지난 26일 캄보디아와 태국 국경 인근 영유권 분쟁 지역인 프레아 비헤아르를 찾아 연설하고 있다. 프레아 비헤아르=캄보디아국영통신·AP 연합뉴스


이어 “나는 (패통탄 총리 아버지인)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에게 배신당한 적이 있다. 과거 그도 태국 국왕을 모욕하는 말을 한 적 있다”며 “민감한 대화 내용을 공개하겠다”고 위협했다. 태국에서 불경죄는 최대 징역 15년에 처해질 수 있는 중범죄다.

태국 내 시위·탄핵 움직임 거세져


태국 정부는 즉각 반발했다. 러스 잘리찬드라 태국 외무부 차관은 “훈센의 발언은 명백한 내정간섭이자 국제법 위반”이라며 “태국 내 특정 세력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엿보인다”고 꼬집었다.

28일 태국 방콕에서 패통탄 친나왓 태국 총리의 사퇴를 촉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방콕=로이터 연합뉴스

28일 태국 방콕에서 패통탄 친나왓 태국 총리의 사퇴를 촉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방콕=로이터 연합뉴스


하지만 훈센 전 총리가 던진 불씨에 태국 정국은 연일 들끓고 있다. 28일 방콕 도심에서는 시민 2만여 명이 모여 패통탄 총리 사임을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2023년 총선 이후 최대 규모 반정부 시위다. 시위대는 “부패한 총리가 캄보디아에 나라를 팔아 넘겼다”고 성토했다.


정치권 압박도 거세다. 연립정부 내 제2당인 품짜이타이당은 연정에서 탈퇴하고 패통탄 총리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추진 중이다. 보수 진영이 장악한 상원은 헌법재판소와 국가반부패위원회(NACC)에 총리 탄핵을 청원했다. 헌재는 다음 달 접수 여부를 검토한다.

정치에서 잔뼈가 굵은 이웃 국가 원로 정치인의 한마디에 태국 정치 지형이 통째로 흔들리게 됐다는 평가다. 태국 탐사전문 매체 CSI LA는 “훈센은 태국 파벌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을 국경 너머에서 조용히 지켜봤다. 패통탄 총리는 진심을 담아 외교 전장에 나섰지만 훈센이 숨겨진 카메라와 함정을 들고 들어왔다”고 진단했다.

하노이= 허경주 특파원 fairyhkj@hankookilbo.com